우리는 윗세대, 부모세대보다 한껏 자유로운 시대, 대통령을 대놓고 욕해도 일당하지 않는 시대가 된지 40년이 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부모세대의 그 연속적인 독재자들의 시대가 지나고 너도나도 할말은 하고 사는 시대가 된 것이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시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노파심같은 마음이 생긴다. 구세대가 맞닥뜨리면서 살 수 밖에 없었던 파시즘은 전체주의노선 아래에서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언론 등의 권리를 억압하고 빼앗아버림으로 인해서, 그리고 전체주의가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행동은 사법으로 다스리는 등 무엇이든 못 듣고 못하게 막는 형태였다.
지금은 어떤가. 아이부터 노인까지 이제 어떤 정보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널리고 널린 인터넷의 방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대다. 정치적으로는 아직 세대갈등 등 요소가 남아있지만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것처럼 보이며, 마음대로 가고 싶은 데 가고, 내가 업으로 삼는 일에 대한 제약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데다가 대통령도 임기 전에 바꿔버릴만큼 국민의 힘이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하지만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나치에 동조한 "보통"독일인들의 심리를 연구하면서, 능동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이유와 파시즘이 대두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힌 바에 비추어 본다면, 지금 우리의 상황도 썩 좋지만은 않다. 겉보기에는 국민들이 헌법적 자유를 한껏 누리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 언론과 양심의 자유란 기득권세력이 자신들의 유리한 체제유지를 위해 급조해 놓은 이념에 다름 아니다. 언론권력들과 기득권세력들이 결국에는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므로 - 배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논증했듯 - 그외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이 이미 걸러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맞춰놓은 문화, 정보, 법, 정치, 사회적인 소산물들이다. 대기업의 이익에 맞춰서 조작되거나 판결되는 사건들, 가진자들의 삶에 대비해 매체 한 구석에서도 다루어지지 못하는 없는 자들의 현실, 겉으로 서로 근거도 없이 비방하는 것처럼 보여서 양극으로 갈려 서로 충돌하지만 실제의 비방들 안에는 양극단을 지휘하는 소수의 이익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다. 게다가 개인들에게 쏟아져드는 정보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그 질적 속성을 일일히 검토해 받아들일지를 결정할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개인이 접하는 정보들이 과연 맞는지 틀리는지, 개인의 사상과 인격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부차적인 검통인이 된다. 개인 또한 정보에는 익숙하지만 자신만의 지식과 사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배우지를 못하다보니 그저 기득권들이 쏟아내는 정보가 내가 생각하는 것인양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종류의 파시즘이 생겨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기존 전체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전체에 개인을 녹여내서 돌아가게 만들었지만, 현재 생겨날 파시즘은 전체주의적인 요소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개인을 중시해주는 것처럼 꾸며놓은 상태에서 그에게 그가 스스로 생각하고 사상을 키우는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공작을 벌임으로써 파시즘과 유사한 상태를 만든다. 전체주의처럼 국민들에게 어떤 공동의 목표 - 독일 제3제국의 아리아인 제일주의, 박정희의 경제발전 우선 - 를 제시해서 따라오도록 유도한 다음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거나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보통의 국민들을 "서민"이라고 전제한 뒤에 사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발전하는 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교육제도부터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유도한다.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지위에 두고자 수당지급 등으로 환심을 살 뿐, 더 넓고 더 멀리보는 정책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돕기보다는 그때 그때 필요한 정도만 도와줌으로써 개인 스스로의 경제적, 사상적 자립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로 인해 생기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나보다 많이 가진 자에 대한, 나와는 다른 자에 대한 적개심에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기득권에 의한 기득권을 위한 민주적 파시즘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