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안톤 체호프
연영과를 준비하던 친구들이나 학생들이 꼭 보는 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체호프의 극작품들이 있습니다. 전공 학생들도 많이 곤란해하는 체호프의 글은 저에게도 어렵게 다가왔었는데, 그나마 쉽고 읽기 편했던 작품은 이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1899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처음 시연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하게 공연을 하는 작품인데 사실 이 작품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4막으로 이루어진 시골 생활의 광경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많은 상황과 대사들이 19세기 러시아 시골의 시대상을 저절로 보여줍니다. 보드카나 차와 같은 작은 것들에서부터, 왕진 온 의사나 영지를 가진 교수 등 중심이 되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대사와 주변 풍경들에서 그 시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체호프가 이 희곡을 쓴 1897년으로부터 100여 년이 훨씬 지난 몇 년 전 서울의 한 극장에서 시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체호프의 원형을 어떻게 살렸을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주인공 바냐와 어머니와 죽은 여동생의 딸인 쏘냐와 함께 순박하게 농사짓는 농부가 등장합니다. 어느 날 이 영지로 퇴직한 교수, 매부와 그의 젊고 아름다운 후처 엘레나가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엘레나에게 첫눈에 반한 바냐, 바냐의 친구 의사 역시 엘레나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바냐는 대단한 학자로만 알았던 교수가 실은 어리석은 속물임을 깨달으며 교수가 영지를 팔겠다고 하자, 그동안 쌓였던 원한과 분노가 폭발해 권총을 들이댑니다. 다행히 총알은 비껴가고 교수와 엘레나는 허겁지겁 영지를 떠나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 역시 원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평정의 생활을 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체호프의 연극은 어렵다는 통념이 있어서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시연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20세기 현대 연극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실제로 지루하고 흥행이 힘들다는 편견 때문에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다가 100년이 훨씬 지난 2013년에야 차태호 연출가님에 의해 무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연출가님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드라마나 갈등 관계과 명확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우리의 현실을 많이 반영했다는 점에서도 값진 작품이라는 인터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평생 매부를 위해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바냐의 현실과 심정이 흔히 우리 아버지들의 삶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 : 내 삶은 없었다. 반평생 당신을 위한 대가가 뭐냐?
바냐의 외침은 모두가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실체라고 느껴졌습니다. 또 갑갑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엘레나와 짝사랑에 괴로워하는 쏘냐, 일은 열심히 하지만 마음의 등불이 없어 괴로워하는 의사, 독선과 아집에 갇혀 남을 쉽게 상처 입히는 교수들의 모습이 권력과 사랑 사이에 놓인 모습들이 우리 사회에 빈번히 일어나는 갈등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분노의 폭발이 모든 갈등의 해결 고리가 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 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실은 무책임하고 잔인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P : 우리 힘을 내서 살아가요. 이 길고 긴 낮과 밤을 쉼 없이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내리는 시련을 우리 꾹 참고 살아가요. 지금도, 늙어서도, 한시도 쉬지 말고 남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때가 오면 정직하게 죽어요.
한 세기가 지나도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고전의 매력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빛은 퇴색하지 않고 가치가 계속 생길 거라 믿으며 책이라는 이 한 문화를 거스를 수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