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오스카 와일드
어렸을 때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나 음악들을 당시에는 좋아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억 저 먼 곳으로 밀어 넣어버려서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보통은 살아갑니다. 한참을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심장도, 걷고 있던 다리도 멈추게 하며 당시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소환되면서 알 수 없는 묘해지는 기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보게 된 책에서도 어머니 무릎에 누워서 고구마를 까먹으며 들었던 이야기가 나와서 그 시절이 그리워져 뭉클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저택에 혼자 사는 거인이 그곳에서 놀던 아이들을 모두 내쫓아버리자 더 이상 정원에 봄이 오지 않고 겨울만이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마치 초등학교 때 일기장을 꺼내보듯이 머릿속으로 그 이야기들이 상상이 되어 펼쳐지자 왜 이제 왔냐며 웃으시는 외할머니의 반가운 미소가 담긴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과 서리, 우박과 북풍만이 계속되는 거인의 정원에서 거인의 마음을 열게 했던 귀여운 아이가 사실은 아기 예수였으며, 여러 해 뒤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나 거인을 하늘나라로 데려간다는 뒷이야기는 이번에 다시 읽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여러 이야기가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어렸을 때 젊었던 엄마가 떠오르는 책이었습니다.
물론 거인의 정원에 둘러쳐졌던 높은 담은 이미 없어졌고, 정원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인 그곳은 제가 먹은 세월만큼이나 이야기에도 나이를 먹게 되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 저 먼 남쪽으로 떠나는 제비에게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보석 조각들을 떼어내 가난한 예술가와 병든 아이에게 나누어 주라고 부탁하는 <행복한 왕자> 이야기도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라 반가웠습니다. 한참을 읽고 있다가 이토록 슬프고 아름다운 동화들을 썼던 작가가 누군지 궁금해졌고 나중에서야 그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작가에게도 특별했을 책인 거 같습니다. 장난기 농후했던 작가의 진지한, 어찌 보면 그의 참모습을 느끼게 해주는 단편들이 이 안에 있습니다. 특히 표제작인 <별에서 온 아이>는 나무꾼 부부가 숲에서 갓난아기를 발견하여 데려다 키우면서 시작되는데 아기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년으로 자라지만, 냉혹한 마음을 가져 자신의 어머니라며 나타난 거지 여인을 쫓아버립니다. 그 후 소년의 외모는 두꺼비와 뱀처럼 추해졌고, 소년은 집을 떠나 방랑하며 마술사에게 노예로 팔려 온갖 시험을 거치게 됩니다. 마침내 소년은 나병환자로 변장해 있던 아버지와 거지 여인으로 변장해 있던 어머니가 왕과 왕비임을 알게 되고, 왕이 되어 강가의 도시를 다스리게 됩니다. 아이는 사람들에게 자비심과 공평함을 보여 주었고, 가난한 자에게는 빵을, 헐벗은 자에게는 옷을 주며 평화가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동화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다음과 같은 결말을 덧붙입니다.
P : 아이는 그리 오랫동안 그 도시를 다스리지 못했다. 고생을 너무 심하게 한 데다 너무 힘든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3년이 지나 아이는 죽었다. 그리고 아이의 뒤를 이어 다시 사악한 왕이 도시를 다스렸다.
이 책에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믿고 추구하고자 했으나, 냉혹한 세상에 실망하고 좌절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변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죽음 앞에 쓰인 책이라 마무리는 다소 이렇게 어둡숩니다. 낭만적인 작품과 애틋한 느낌으로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을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쓴 멋진 작가이지만 동성애 혐의와 주변 사람들에게 끝없이 손가락질받으며 도망치며 살아야 했던 그는 온갖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도 모든 주인공이 마치 자신인양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해피엔딩 만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