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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Dec 02. 2023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by 조르주 페렉

조르주 페렉의 이미지는 저에게 있어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지루한 묘사를 즐겨 쓰는, 그래서 난해하고 (솔직히) 재미없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글은 박학다식한 지성을 배경으로 복잡한 글쓰기 형식을 실험할 뿐 아니라 몇 권 읽어본 누보로망 계열의 이야기 없는 소설 구조가 아직은 낯설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듯한 객관적 묘사로 그 지나친 엘리트주의적인 문학 경향 때문에 독자들을 멀어지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실험들은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지적으로 탐색함으로써 소설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이 책은 평소 페렉의 작품 경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여기에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산뜻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얼핏 불필요해 보이는 각 작품에 대한 장황한 묘사나 해설들, 마치 어느 화가와 그 화가의 작품에 대한 미술비평집처럼 보이는 구조 때문에 문학 작품을 읽는 건지 전시회 팸플릿을 읽는 것인지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이 납득이 되는 독특한 설정과 나름의 통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술의 재현과 예술가의 운명 등에 대한 깊은 지적 통찰이 이 책이 그저 특이하다고 치부했던 제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191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시의 전시회에서 공개된 독일계 미국인 하인리히 퀴르츠라는 화가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라는 작품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날 이 미술작품이 세간의 놀라운 관심 대상이 되어 떠들썩한 소동이 일어나는데 사실 이 작품은 하인리히 퀴르츠라는 화가가 사업가이자 무엇보다 유명한 미술품 컬렉터인 헤르만 라프케의 주문을 받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그 전시회 또한 헤르만 라프케의 컬렉션 가운데서 고른 작품들을 전시하는 행사였는데 작품이 물의를 일으킨 까닭은 그 작품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은 삼면의 벽이 보이는 한 방을 묘사하는데 헤르만 라프케가 그 안에 있고, 각 벽에는 그가 소장한 유명한 작품들이 약 100여 점 이상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제된 백 여점의 그림들 가운데는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란 작품도 다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거울 속의 거울 효과"가 그 작품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무한히 자기 복제하는 거울은 심지어 전시회가 개최되는 방조차 그 작품을 그대로 복제한 형태로 꾸며집니다. 무엇이 진품과 위작을 구분하게 해 주는가, 진짜 진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이나 미셸 푸코의 <미술 비평>을 떠올리실 수 있습니다.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면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예술이 상업주의에 예속시켜 버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로 또는 허구인 예술 자체의 본질에 대한 포스트 모던한 비평으로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열린 결말을 좋아하는 저는 이 작품도 자신의 완성을 위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P : 오직 사실을 가장하는 행위의 즐거움과 짜릿한 전율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 허구 이야기의 세부 묘사가 대부분 가짜인 것처럼.



이 책은 조르주 페렉의 마지막 소설책입니다. 소설과 시, 희곡, 시나리오, 미술평론 등 전방위적 글쓰기를 펼친 그는 “오랫동안 화가가 되고 싶었다”라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페렉은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 같은 제목(un cabinet d'amateur)의 그림을 보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 책의 전작인 <인생사용법>의 연작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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