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준경 Oct 22. 2024

Everything은 곧 Nothing이 된다는 필연


영화의 현재학은 영화의 내용 전개를 통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이해해 보자는 취지의 기획입니다. 따라서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으니, 스포일러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읽지 않으시기를 권장드립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생각하면 영화에 등장한 '에브리씽 베이글'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영화에서 다중우주 속의 모든 자신과 연결되어서 전지전능한 능력을 얻은 조이는 베이글 위에 모든 것(Everything)을 베이글 토핑처럼 올려보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베이글 위에 올려놓은 조이는 그것을 보고서는 자신은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진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이는 이렇게 답한다. "Nothing Matters."(아무것도 의미 있는 건 없어)


이 영화에서 에브리씽 베이글은 무엇을 의미할까? X세대인 조이의 엄마, 에블린보다 빠르게 Z세대인 조이가 연결된 것.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의 자기파괴적 속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가능성들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청소년기나 20대 초반에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와의 접속이 늘어난 Z세대는 자신의 미래상이 될 수 있는 것들과 자신의 연결 또한 늘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수없이 많은 가능성들과의 연결은 오히려 세상에서 아무 것도 의미있는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넷플릭스 1달 무료에 이끌려 처음 넷플릭스를 가입했던 달이 기억난다. 넷플릭스에 들어가자 수없이 많은 가능성들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즐거웠다. 수없이 많은 영화 중에 하나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랏! 이건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이것도 보고 싶었고, 이것도 보고 싶었지! 그러나 결국 나는 아무것과도 제대로 연결될 수 없었다. 이것도 끌리고, 저것도 끌리고, 또 다른 것들도 끌리지만, 막상 도입부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덮어버렸다. 아, 도입부에서 완전한 흥미를 끌긴 어렵다. 하나를 선택하면, 계속 다른 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한 달이 흐르고, 자동결제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결제가 되었으니 한 번 볼까 하다가, 고민만 하다가 꺼버렸다. 두번째 자동결제 후에 비로소 나는 구독 취소 버튼을 눌렀다. 젠장,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2달치나 돈을 낭비해버렸군.....


실제로 나와 같이 고민만하다가 돈을 낭비하고 넷플릭스를 다시 찾지 않는 사람들이 많자, 넷플릭스는 광고 전략을 바꾸었다. 매달, 봐야 할 것을 넷플릭스 측에서 정해주는 전략으로 광고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유효했는지, 넷플릭스는 계속 그 전략으로 광고를 진행하는 중이다. 다만, FOMO가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반골 기질만 강한 나 같이 희한한 사람은 오히려 더 넷플릭스를 찾지 않게 되었다.


영화와 같이 취미생활의 수많은 가능성과의 연결은 그저 플랫폼과의 결별로 끝날 있지만, 나의 장래와 수많은 가능성의 연결은 오히려 자기파괴를 낳을 수도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대학원에 진학했던 초창기의 이야기이다. 다양한 가능성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었다. 인류학이라는 학문의 특성 사회 속에서 만날 있는 모든 것과 연결해서 연구를 진행할 있었다. 그리고 이론적 작업에 대해서도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실제적인 연구 주제와 나를 연결시키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내 욕심은 가득했다. 문제아였던 유년 시절, 그리고 학교 밖 청소년이 되었던 청소년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 나는 큰 인정을 갈구했다. 그렇기에 내 연구가 깊이 있는 이론적 작업이 뒷받침되면서, 사람들이 비교적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인류학의 역사에서 오랜 논쟁이 이루어졌던 주제들과 연결시킬 수 있으며, 사람들의 실생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용성이 띤 연구였으면 했다. 그러나 그런 연구 주제를 찾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실천인류학의 최고봉 의료인류학을 해보자 해도, 그것이 인류학의 역사에 오랜 논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비교적 쉽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결과를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결과, 어떤 집단을 연구참여자로 둘지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로 긴 시간이 흘렀고, 자기파괴의 욕망에만 시달리며 오랜 시간을 거쳐야 했다. 넓은 가능성의 바다에서 헤매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어느 것도 만족스러울 없었으며, 매일 같이 연구하고 싶은 주제는 바뀌어도 끈질기게 매달릴 있는 주제는 없었다.


이 영화의 조이 또한 매한가지다. 수없이 많은 가능성 속에서 헤맨다. 그 무엇도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모든 것을 열어놓기만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기에 그 중에 어느 것도 정말로 소중하지가 않다. 모든 인생에는 근사한 순간이 있지만, 그 다음에는 힘든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다중우주 속의 연결을 이루어낸 다양한 에블린이 자신에게 부딪친 난관을 극복하려는 것을 보고 조이는 말한다. "좋은 감정이 생기고, 희망이 벅차 오르고... 내가 시간을 아껴줄게. 결국에는 그것들 전부 사라져." "봤지. 시간 문제야. 모든 건 알아서 균형을 되찾아."


도파민에 관한 연구들은 도파민의 분비로 인해 기분 좋은 뇌는 결국 알아서 균형을 되찾기 마련이라고 말해준다. "우리가 쾌락을 경험할 때, 도파민은 우리의 보상 경로에 분비되고 저울은 쾌락 쪽으로 기울어진다. 우리의 저울이 더 많이, 더 빨리 기울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쾌락을 느낀다. 하지만 저울에 관한 중요한 속성이 하나 있다. 저울은 수평 상태, 즉 평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울이 쾌락 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저울은 다시 수평 상태로 돌리려는 강력한 자기 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한다(에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그렇기에 인간은 어떠한 선택을 하든 즐거움만을 경험할 수가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인생의 많은 시간은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청소년기 혹은 청년기에 진정한 커리어를 갖기 전에 수없이 많은 가능성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일은 사람을 괴롭게만 할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해도 만족스러운 것은 한 순간이지만, 어떤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의 눈 앞에서 또다른 가능성이 보여질 때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후회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후회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해봤던 모든 것은 부질없었으며, 세상 모든 것이 의미없는 것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공허함의 순간, 에블린은 자신이 버릴 수 없었던 한 관계 때문에 결국에는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인생을 같이 하고자 결심해서 부모님을 버리고 홍콩에서 미국까지 따라나서게 한 웨이먼드라는 배우자 덕분이다. 모두가 적대적이 되고 그로 인해 싸우는 순간, 웨이먼드는 울부짖으면서 말한다. "제발요! 제발! 우리 제발 그만 싸우면 안 될까요? 다들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려는 거 알아요. 나도 혼란스러워요. 하지만....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왠지... 다 내 잘못 같아요.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우리가 다정해야 한다는 거에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때.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그 말을 들은 순간 에블린은 변한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다정함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평론을 하곤 한다. 그러나 올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 혼자 이건 완성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가 된 경험을 한 나로써는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작가들은 그렇게 담아내고 싶은 말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너무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은 짜치는 느낌이 난다. 그렇기에 훌륭한 서사일 수록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간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칼 융은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두고 자신의 그림자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헷갈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융이 말하는 그림자는 자신이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된 자신의 일부이다. 아이는 연약하며, 그렇기에 자기 존재의 불안을 관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유년기에 겪는 상처들을 최대한 덜 겪도록 만든다. 무시받거나 버림받지 않도록,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유년기의 특성 상 무시받거나 버림받지 않도록,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선택하고 스스로 훈련한 전략인 페르소나는 부모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에블린의 아버지는 사람을 순진하게 믿어보고자 하고, 다정하게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을 철저히 무시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에블린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과 웨이먼드를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에블린은 자신이 숨긴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웨이먼드에게 끝없이 이끌려서 그를 따라 미국까지 건너왔다. 그러나 에블린은 그 시점까지도 자신의 인격과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시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웨이먼드와의 관계는 계속 파국으로 치닫았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투사인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다정함이 숨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에블린은 '다정한 투사'가 되기를 선택한다. 이로 인해 일차적인 위기(들)을 극복한다.


에블린이 자신이 선택한 관계에 대하여 긍정하고 위기(들)을 극복한 경험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긍정하는 자신의 태도로 이어진다. 그렇게 에블린은 수없이 많은 연결들 속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에블린은 여태껏 자신이 선택한 삶을 긍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이곳에서 조이와 함께 있고 싶다고 조이에게 말한다.


하지만 조이는 그 선택에 따르는 고통을 말하고, 다른 가능성들이 에블린에게 열려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뭐? 나머지 문제들은 다 무시할 것야?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엄마 딸의 모습이.... 안 이런 곳(에블린은 조이의 체중에 대하여 늘 지적한다). 이곳은 그래봐야...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줌의 시간뿐인 곳이야."하지만 에블린은 그 선택에 따르는 즐거움만을 보고 소중히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소중히 거야. 한줌의 시간을."


인터넷 세상의 수많은 연결은 우리에게 허무주의를 경험하게도 한다. 특히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의 시각문화는 우리에게 외모, 성공, 라이프스타일 등의 면에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습관이 강화시켰고 이것은 불안감과 자존감의 저하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플랫폼은 끊임없는 비교,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 사회적 압박을 노출시켜서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도 한다. 많은 나라의 통계들은 청소년들에게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소셜미디어에 광범위하게 접속할 수 있게 된 2010년대 이후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이 되었음이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소셜미디어의 사용을 줄이는 것만이 해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광범위하게 소셜미디어가 만드는 문화의 영향을 주변사람들이 모두 받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아무리 소셜미디어의 사용을 줄인다해도 일정정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긍정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긍정하고, 자신의 마음이 선택한 관계들의 영향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허무주의가 주는 자기파괴적인 자장을 차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Everything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은 "Nothing matters"로 연결되게 된다.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말은 특별히 소중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명한 것은 영화 말미에 에블린과 조이처럼 내가 가진 선택한 기반 위에서 "We can do whatever we want."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내가 선택한 것 위에서 또 하나를 선택해나가야 한다. Everything은 필연적으로 Nothing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