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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Feb 11. 2021

큰엄마의 161번째 차례상

무밥을 지으며 떠올리는 큰엄마

"병원밥에 떡국이 나올는지 모르겠다."


수화기 너머 큰엄마가 말씀하셨다. 수술을 하신 큰아빠 간병으로 두 분이 병원에 격리 아닌 격리가 되어 계시니 올해 설날은 병원에서 보내시게 된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는 명절에 큰집에 간 적이 없는데 올해는 유난하게 큰엄마 생각이 났다. 큰엄마의 161번째 차례상이 올해 없다는 것이 낯설었다.



결혼 41년 차,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의 제사와 두 번의 명절. 그렇게 큰엄마는 일 년에 네 번은 큰 상차림을 하셨다. 형제는 큰아빠와 아빠 두 분만 계시는 터라 식구는 단출했고 고만고만한 나이의 아이들은 두 집을 합해 넷이었다. 어른이 넷, 아이가 넷인 명절. 대강 손가락으로 계산했을 때 큰엄마는 못해도 160번의 상을 차려내신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명절을 좋아했고 친척이 모이는 것을 좋아했다. 또래 사촌들과 종일 놀다가 맛있는 것을 먹고 선물과 용돈을 받고 가까운 어딘가를 놀러 가는 것이 명절인 줄 알았고 제삿날인 줄 알았다. 딱히 부엌일을 시키신 적도 없고 간혹 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조몰락거려보긴 했지만 큰엄마도 엄마도 우리를 시키지 않으셨다. 딸아이라고, 나중에 시집가면 할 거니까 배워야 한다는 것도 없었다. 큰엄마와 엄마는 음식을 하는 몸짓이 부산스럽지 않았고 조용한 부엌에서는 깔끔한 음식들이 일정한 속도로 쌓여갔다. 그것이 어린 시절에는 쉽고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달래는 하얀 뿌리 부분을 자를 때 칼로 살짝 눌러준다. 훨씬 달래 간장 향이 좋아진다.



큰엄마는 작고 다부지신 분이다. 음식을 하는 큰엄마의 손은 야물어 보였다. 늘 물기가 있는 그 손은 음식에도 생기를 주고 모든 음식을 매끈하게 보이게 했다. 손맛이라는 말을 들으면 큰엄마의 작고 물기 있는 매끈한 손이 떠오른다. 마른 음식에 수분을 주고 참기름이 베어 나오는 듯한 손을 거치면 멸치볶음도 그렇게 윤이 났고 결 따라 쪽쪽 찢은 장조림도 짜지도 달지도 어느 한쪽으로 맛이 치우치지 않고 살살 녹았다. 

 차례상 음식도 그랬다. 가짓수만 많고 딱히 손 가는 거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일 년에 네 번 맞이하는 상 위에 음식은 뭐든 맛있었다. 아쉬움 없는 재료로 입에 넣으면 모든 것이 착착 정답 같은 맛이었다. 모든 가족이 음식을 좋아했고 만족해했다. 밥상 위에서도 생선살을 도톰하게 발라내 주시거나 고기를 알맞게 잘라주시던 큰엄마 손은 빠르지만 조용했고 마법 같았다. 


결혼을 하고 나니 명절이 고된 날이 되었다. 이래저래 차리기만 하면 되는 차례상을 마주하러 가는 것도 마음이 좋지 않았고, 식구들 모이면 먹을 밥상에 뭘 차려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명절만 되면 두배는 족히 뛰어버리는 재료값들에 즐겁지 않은 장보기가 되었고 무엇보다 음식을 기쁘지 않게, 정말 노동으로 하고 있는 나를 보면 스스로가 싫어지기도 했다. 이 좋은 재료로, 일상 음식이 아닌 나름 특별한 음식을 하면서 이렇게 행복하지 않아도 되나 스스로 슬퍼지기까지 한 것이다. 


정성스럽게 김을 구웠다. 밥을 담뿍 싸서 먹으면 복이 오는 느낌이다.



수화기 너머 큰엄마는 그래도 이런 나를 담뿍 칭찬해주셨다. "그래도 요즘 그렇게 음식 해서 그득그득 손에 들고 가는 며느리가 어디 있니. 기특하고 착하고 대견하다."  그러고 보니 큰엄마와 엄마는 음식을 하시며 허리 아프다 '끙' 소리 한번 우리들 앞에서 내신 적 없고 지겹다거나 해치워버려야겠다 라는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없었다. "큰엄마가 하시는 거 보고 자라서 그래요. 가족이 모이니까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큰엄마랑 엄마 흉내 내는 거예요." 이건 정말 진심이다. 괴롭게 음식 하시는 모습을 보았다면 사실 그 괴로움이 대물림이라 생각하고 넌덜머리 났을 텐데 즐겁지는 않으면서도 그래도 해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 한구석의 힘은 어쨌든 큰엄마의 그 물기 있는 손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통화 말미에 큰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했어."



기쁜 마음을 받아먹고 자랐다. 윤이 나게 끼니때마다 구워주시던 김이나, 차례상을 차리시는 틈틈 말아주시던 속이 꽉 찬 김밥이나 간식으로 만들어주셨던 뽀얀 팝콘이나, 그 모든 것들이 반찬 두세 개만 만들어도 지쳐버리는 나에게 그때의 큰엄마를 돌아보게 했다. 그저 무밥 하나를 지으며 마른 김을 구우며 소박하고 별거 없는 밥상이라도 좋으니 다정하게 차려 큰엄마와 함께 먹고 싶다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큰엄마에게 밥상을 차려놓고 말씀드리고 싶다. "큰엄마, 정말 기쁜 마음으로 차렸어요."



기쁜 마음으로 밥상을 차리고 싶다.  나는 기쁨을 받아먹고 자랐다.









겨울무는 달다, 무밥을 지어보자.



쌀 3컵 기준

무 450g


양념장

달래 20g

간장 4T

매실청 2T

물 1T

맛술 1T

참기름 1T

홍고추, 청고추 반개씩

마늘 1/2T


1. 마늘은 다지고 홍고추, 청고추는 잘게 썰어준다. 

2. 달래도 잘게 썰어준다.

3. 분량의 재료를 넣고 섞어준다. 

4. 무는 채 썰어준다. 

5. 불린 쌀 위에 무를 깔고 밥을 짓는다. 

6. 물은 평소 밥 물 양보다 적게 잡는다. 

7. 압력솥으로 할 경우 무가 뭉개질 수 있으므로 가급적 무압력으로 가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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