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생을 좌우할 족쇄
성범죄처럼 학교폭력을 대할 때도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이 중요하다. 최근 스포츠 스타들의 학교폭력 이슈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한때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스타의 부상을 지켜보는 피해자들의 심경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다. 본인에게 씻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긴 선수들이 많은 팬들의 사랑과 높은 연봉을 받고, 미디어는 그들을 집중 조명한다. 스포츠 스타들의 학교폭력 이슈의 신호탄이 됐던 배구선수들은 최근 언론과 해명 인터뷰를 가졌다. 일성은 ‘억울하다’였다.
이 선수들이 억울한 이유는 앞으로 차차 밝혀질 수도, 영영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폭력 피해자의 상흔이 깊은 원인이 피해자 중심주의가 결여된 학교폭력 대처 방식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짚어야 한다. 교내에서 폭력 문제가 불거지면 대체로 부모님과 선생님 등 어른들은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 간의 화해를 종용한다. 그 순간 가해자는 처벌이 아닌 온정주의의 대상이, 피해자는 보호가 아닌 용서의 주체로 둔갑한다.
피해자를 향한 ‘용서 압박’은 전방위적으로 몰아친다. 앞선 배구선수의 사례처럼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무릎을 꿇고, 부모님이 머리를 조아리면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혹은 가해자가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칠 수 있을까. 처벌 없는 용서가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지 우리 사회는 합의한 적이 없다. 법적 처벌과 학교폭력 대응 매뉴얼은 그래서 존재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때때로 가해자가 처한 열악한 가정환경은 용서의 단서로 작동한다. 바쁜 부모님, 한부모 가정, 가난 등의 이유는 가해자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을 부각한다. 가해자의 잘못이 어른들의 잘못이 되고, 어른들의 잘못은 사회의 잘못이 된다. 그 순간 책임의 주체는 모호해진다. 가해자에게 온정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반면 피해자가 가해자와 같은 혹은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한다.
10대 때 실수가 평생을 좌우할 족쇄가 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반성과 성찰 그리고 용서를 통해 우리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잘못을 명확히 규명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분명히 처벌해야 한다. 처벌이 없다면 반성을 증명할 수 없다. 아이들이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은 궁색할 뿐이다. 같은 변명은 어른들의 입에서도 반복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 친구 사이의 다툼 정도로 격하될 때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깊어진다. 잠깐의 실수로 가해자에게 평생 폭력범 낙인이 따라다니는 것도 지나치니, 모두를 위해서라도 분명한 처벌 이후에 용서를 모색할 일이다. 학교폭력에 대처하는 제도와 규범은 이미 존재한다.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와 피해자를 향한 용서의 압박이라는 안개를 거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