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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May 05. 2024

해가 나면 사라질 빗방울처럼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닌데 온몸이 무거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계절임에도 겨울에 덮던 거위털 이불을 치우지 않은 건 밤이면 찾아오는 오한 때문이다. 잠이 들려는 시점이 되면 양쪽 팔과 목 주변으로 오한이 찾아온다. 선잠에 들었다가도 온몸에 스며드는 오한 때문에 잠이 깨곤 한다. 한 여름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 있으면 시원한 바닷물이 내 몸을 간질이며 그들의 체온을 전해오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잠들기 전에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한 치의 바람도 들어올 수 없게 꼭꼭 몸 밑으로 쑤셔 넣는다. 그래서 아직 거위털 이불을 치우지 못했는데, 오늘은 거위 털들이 제각각 자리 잡아 한 마리의 거위로 재탄생하여 양쪽 날개를 펼치고 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다.


 잠시 눈을 떠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0시. 방문 밖에서는 남편이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나 보다. 점점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거위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오전 11시 30분. 더 이상은 시간을 버릴 수가 없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암막커튼을 젖혔더니, 비가 내리고 있다. '아... 비가 온다고 했지... ' 어쩐지 어제부터 다리도 쑤시고, 팔도 아려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창가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돌아서며 마주친 침대 위의 거위는 너무 포근한 미소로 양 날개를 펼친 채 나를 부르고 있다. 엄마 품보다 포근하고, 남편 품보다 따뜻한 거위 품을 포기하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밤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한다. '미안. 저녁에 다시 만나자'


 허기진 배를 채우고, 창가에 위치한 나만의 아지트인 책상 앞에 앉으니 창틀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이 보인다. 창틀에 매달려 반원모양의 형체를 갖춘 빗방울은 하나의 방향으로 또르르 달려가기도 하고, 마음이 바뀌었는지 중간에 방향을 바꾸는 빗방울도 있다. 두 개의 반원이 만나 하나가 되기도 하고, 하나가 두 개로 나눠지기도 한다. 그들만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여러 형태로 몸을 바꿔가며 춤을 춘다. 춤을 추다 힘들어지면 다음 무대를 찾아 바닥으로 똑 떨어진다. 떨어지며 다시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만나 하나가 될까? 다른 층의 난간에 매달려 다시 춤을 출까? 성질 급한 이는 창문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고, 신중한 이는 군인들이 행군하듯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나간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삶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꼭 우리네 모습 같다. 


 다시 해가 나면, 저 빗방울들은 바짝 말라 공기 중으로 사라지겠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으니 지금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거겠지. 내일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열심히 자신을 희생하며 살기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열심히 순간을 즐기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후회는 지금의 시간을 과거에 묶어놓을 뿐이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저 빗방울들처럼 자기에게 맞는 모습을 찾고, 춤을 추며, 춤출 무대가 좁아지면 더 큰 무대를 찾아 용기 있게 나아가는 것이다. 해가 비추기 시작해서 흔적 없이 사라질지라도 내가 있었던 시간만큼, 함께 춤췄던 이들과 행복했던 기억을 남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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