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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르녹 Aug 14. 2024

[짧은 픽션] - 이방인




추운 겨울이었다.


코 끝이 시릴정도로 날카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밤 11시를 훌쩍 넘긴 거리 위는 한산했다.


나는 코트의 깃을 세우고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히 찔러 넣은 뒤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발가락의 감각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네, 날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길을 걷고 있던 내게 한 남자가 불쑥 나를 멈춰세우듯 물었다. 물빠진 갈색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이었다. 

모자옆으로 백발의 곱슬머리가 지저분히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당황하며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낯선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기억력이 좋지 못합니다. 저희가 어디서 뵌 적이 있습니까?"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말없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말했다.


"역시 저지른 사람은 기억을 못하는 법이지." 그가 말했다.


그의 두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뿌연 담배연기가 잠시 내 두 눈을 가렸다.

나는 그의 말에 의아하다는듯 미간을 찌뿌렸다.


"아직도 그렇게 떠돌이처럼 사는 겐가?" 그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르신." 


"아무렴."


그리고 잠시후 노인은 담배를 털고 모자를 벗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그의 얼굴과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는 몇일전 나를 살린 노인이었다.


그가 표정의 변화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야 기억이 났나보군. 다행히 아직 살아계시는구만." 

하며 가벼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내게 말했다.


"상처는 좀 아물었는가?"


"조금씩 새살이 돋기 시작하나봅니다. 간지럽네요. 감사했습니다, 어르신." 내가 말했다.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다시 푹 눌러 쓰고 옆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내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네. 단지 조금 더 이곳에 머물러 본 사람의 도리로서 생각해주시게나. 

자네도 나도, 다들 떠도는 이방인들이지 않은가. 잘 살아보시게."

라고 말하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바닥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그렇게 노인은 떠났다.


내가 집에 돌아온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긴 후였다. 불빛 하나 없는 방 안 침대위에는 깊이 잠들어 있는 마리아와 나의 아들, 호세가 누워있었다. 호세는 마리아의 품 깊숙히 안겨있었다. 혹시 그들이 잠에서 깰까, 나는 조심스레 옷을 벗고 흐르는 물에 대충 몸을 닦고 나와 그들 옆에 나란히 누웠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적막에 쌓인 차가운 새벽 공기가 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며칠 전, 난간 아래로 나를 집어삼키려던 차가운 강물의 물결이 어둠속에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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