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사랑은 할머니
요 며칠 비가 계속 내렸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비는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나에게 비는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하는 두려운 존재다.
작년엔 정말 비가 많이 내렸다. 하늘을 자주 보는 나인데, 작년 여름엔 하늘을 얼마나 바라봤을까? 비를 맞으며 하늘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그저 비가 내리는 모습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코로나로 인해 나들이를 갈 수 없어, 매일 아이를 데리고 과수원에 나들이를 갔었는데... 매일 같이 내리던 비는 그 작은 나들이마저도 앗아갔다.
앗아간 것이 나들이뿐이랴. 사과 농사도 앗아갔다. 냉해, 장마, 태풍. 정말 농사가 안되라 안되라 했던 작년이었다. 사람의 탓이 아닌데도 시부모님은 자신들을 탓하시며, 건강을 잃기도 하셨다. 그런 작년 한 해를 보내고 나니 일기예보에 비가 보이면 가슴이 덜컹덜컹한다.
올해 5월 한 달도 비가 많이 내렸다. 금요일만 되면 비가 오는 탓에 주말에 외출 계획이 어그러지기 일쑤. 어린이집 하원 후 매일 과수원에 놀러 가던 아이들의 계획도 어그러졌다. 맑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해가 비췰 때마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과수원으로 달렸다.
비가 내리던 주말이 지나가고 화창한 평일. 화창하다 못해 더운 날씨에 긴팔 점퍼를 벗고, 반팔 차림으로 과수원 나들이에 나섰다. 아이들이 신이 났다. 과수원 입구에서 큰아이가 있는 힘껏 외친다. "할머니~" 그럼 저 멀리서 "리톨아~"하는 음성이 들린다. 음성을 좇아 시부모님이 계신 곳을 찾아간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오랜만에 과수원에서 만난 손주를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신이 난다.
손주-그중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친손자-가 오면 어머님은 농부 모드에서 육아 모드로 스위치를 전환하신다. 일이 중요하랴, 손자가 중요하랴. 사실 일을 하고 싶으셔도 연신 할머니를 부르는 손자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음이다.
업히길 좋아하는 큰아이는 벌써 할머니 등에 찰싹이다. 할머니는 손자를 등에 업고 도장지를 따신다. (세력이 지나치고 열매가 달리지 않는 가지를 잘라내는 작업)
"할머니, 그거 왜 짤라요?"
"필요가 없는 거라 그래."
"그럼 어떤 거 짤라요?"
"이렇게 위로 서있는 거. 한 번 해봐."
할머니의 손과 손자의 손이 힘을 합해 수직으로 솟은 가지를 꺾어본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에 한껏 들뜬 아이는 할머니 등에서 말로 작업을 한다.
"할머니, 저거 서있는데." "저것도 서있어."
손자의 말에 할머니가 이리저리 움직이신다. 둘째를 안은 나도 어머님과 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아이 덕분에 나도 어떤 가지를 꺾어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
한참을 작업하던 어머님이 재빠르게 언덕 위로 올라가신다. '어디 가시지?' 궁금해하며 둘째를 안고 열심히 따라갔다. 중턱에 멈추신 어머님. 큰아이와 같이 바닥을 쳐다보신다. 대체 무슨 일이지?
바로 개미다. 산에 사는 개미들이 무리를 지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고 있는 모습. 한두 마리가 아니라 정말 군대라고 생각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그 많은 수의 개미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줄에 맞춰 두 줄로 움직이는 모습이다.
모두 바닥에 앉아 줄지어 가는 개미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할머니 손을 끌고 개미가 나오는 곳을 찾아본다. 개미가 나와서 향하는 곳을 따라가본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개미를 보며 '우와'를 외쳐본다. 사람 발걸음으로는 서너 발자국이지만 개미에게는 수천, 수만 발자국일 거리. 그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는 개미들.
할머니는 그 많은 개미들이 그곳을 걸어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을까? 그건 할머니의 사랑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손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 신기한 모습이 보이면 제일 먼저 손자를 떠올리는 할머니의 마음. 그 모습을 빨리 보여주고 싶어 손자가 언제 오나 목을 빼고 기다리는 할머니의 마음. 새로운 걸 모여줬을 때 신기해하는 손자를 보며 행복한 할머니의 마음.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아이는 알았을까? 신이 나서 개미를 관찰하던 아이가 사진을 찍겠다며 나선다. 나에게 카메라를 건네받은 아이는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자세를 잡는다. 카메라를 가까이 댔다, 멀리 댔다 하며 자신이 마음에 드는 모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무턱대고 찍는 게 아니라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에 할머니는 내 손자 참 멋있다며 사진을 찍는 손자의 모습을 감동 어린 눈으로 쳐다보신다.
신중을 기하던 아이는 첫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달려가 사진을 자랑했다. 할머니의 얼굴에 행복이 담긴다. "리톨아, 여기 와서 찍어봐. 여기 개미집도 있네." 할머니의 코치에 누웠다 섰다 무릎을 꿇었다 여러 자세로 개미와 개미집을 찍는다.
나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개미들의 행진. 할머니의 사랑은 길을 가던 개미의 행진도 장관으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