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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수 Oct 22. 2020

집의 콘셉트는 책, 편집자, 엄마와 딸

한 개인의 소소한 공간 연대기_05화 


다행히 어머니와 남편이 리모델링을 적극 지지해 줬다. 어머니는 ‘네가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보라’는 말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리모델링 비용은 어머니에게 신세를 져야 했다. 리모델링 비용의 최대선을 정해 놓고 도배와 페인트, 싱크대 교체, 부엌 창문 교체, 화장실 두 개만 손보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철거를 시작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예산을 늘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하려니 걸리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살면서 한 번 정도 할까 말까 한 리모델링이었다. 그러나 예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가성비. 돈은 적게 들면서 효율은 백,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움직여야 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내 안에 있는 디자인적 잠재력과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했다. 리모델링용 노트를 마련하고 거기에 공사 리스트, 가구 배치는 물론 마음에 드는 가구의 모델 번호나 가격, 눈여겨본 업체의 전화번호 등을 적어 나갔다. 

 

무엇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은 집의 콘셉트였다. 사실 집의 콘셉트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리 멋진 카페가 좋다고 해도 카페가 집이 될 수 없고, 도서관이 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카페 같은 집, 도서관 같은 집은 가능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고급 자재를 쓰고 비싼 가구를 들여놓아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그곳은 쇼룸과도 같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온 멋진 모델하우스가 보기에는 좋지만 정감이 가지 않는 것은 철저히 사람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모델하우스보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의 노곤한 일상이 묻어 있고, 사는 사람의 취향이 담겨 있다. 


또 모델하우스보다 멋있지는 않지만 사람의 온기가 있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인생이 배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집의 콘셉트는 무엇일까? 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종이에 적어나갔다. 책, 편집자, 기획자, 엄마와 딸, 남편과 나, 자유, 그림, 머그컵, 종이, 여행, 요리, 독서 클럽, 은밀함, 살롱, 문화, 여성, 전통과 현대, 세련됨과 촌스러움, 핸드 메이드, 헐렁함과 구겨짐, 내일 등 몇몇 단어가 떠올랐다. 


우리 집은 책과 큰 책상, 책꽂이가 공간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80대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이 배어 있는 공간, 사람이 사는 집이지만 갤러리 같고, 전통과 현대, 낡은 것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집이어야 했다. 누구든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워야 하는 공간이었다. 

 

집의 중심이 되는 거실에 널찍한 책상을 놓고 거실의 한 벽면을 책꽂이로 채우기로 했다. 책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생각보다 쉽게 집의 콘셉트가 정해졌다. 책이 있는 공간, 평생 책과 함께 살아온 1세대 편집자와 그의 딸인 2세대 편집자의 삶이 배어 있는 공간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그다음 중요한 것은 컬러. 집의 메인 컬러는 화이트와 그레이로 정했다. 평수가 넓은 만큼 화이트에 포인트 컬러가 하나 정도 있어야 했다. 방문 색깔은 화이트와 그레이 중 깨끗한 화이트로 정했다. 이전 주인이 해놓은 화이트 격자창은 올드했지만 잘 살리기만 하면 나름 괜찮을 것 같았다.  


 




가장 첫 번째 작업은 철거. 제일 먼저 부엌 싱크대와 측면 붙박이장을 떼어냈다. 가로, 세로 1미터 정도의 큰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탁 터진 창으로 북한산이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속이 시원했다. 


식탁 위 조명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기로 했다. 부엌 창문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시스템 창호로 바꾸기로 하고 싱크대 상부장은 달지 않기로 했다. 기본 컬러는 화이트로 싱크대 바닥에서부터 1/2은 타일로 1/2은 페인트로 결정했다. 싱크대 컬러는 그레이로 하고 오른쪽 벽 끝에만 긴 장을 짜서, 밥솥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붙박이장으로 꽉 차 있던 측면 공간은 심플하게 냉장고만 놓기로 했다. 


상부장을 달지 않았지만 부엌 전체 길이가 길어 하부장만 있어도 수납에는 문제가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거실을 등질 수밖에 없는 일자형 구조. 거실과 부엌이 넓은 만큼 소통도 중요했다. 음식을 매개로 사람이 모이고, 대화가 오가는 공간을 상상하며 아일랜드 식탁을 놓기로 결정했다. 아일랜드 식탁 길이는 1미터 60센티로 정하고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인덕션을 설치하기로 했다.  


부엌 창문까지 떼어내니 집 안은 그대로 공사 현장이 되었다. 우주선이 지구에 무사히 안착하듯, 무사히 공사를 마치고 새로운 집에 안착하기를 빌었다. 


   

상부장을 떼어내니 숨어 있던 부엌 창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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