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시절, 나는 팝송에 빠져 공부를 망쳤었다.어쩌다가 팝송에 빠지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히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팝송을 몰랐었는데…….
‘여고생 신현수’의 마음을 훔친 팝송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만 나는 어느 한 가수에 꽂히기보다는 여러 가수와 밴드의 노래를 골고루 좋아했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손꼽아 보자면 비틀즈의 『Let it be』와 『Yesterday』, 『Hey Jude』, 사이먼 &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마마스&파파스의 『Hotel California』, 닐 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이다.
그렇지만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팝송은 한국 홍콩 합작 영화『사랑의 스잔나(원제: Chelsia my Love)』의 OST로, 주연 배우 진추하와 아비가 함께 부른 듀엣곡 『One summer night』 이었다. 이 영화 속의 또 다른 삽입곡이자, 진추하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청아한 목소리로 부른『Graduation Tears』 도 무척 좋아했다. 영화『사랑의 스잔나』가 어마어마한 관객을 동원하며 공전의 히트를 친 데다 진추하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에 아마도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One summer night』이나『Graduation Tears』가 지금도 귀에 선할 것이다.
어쨌든 팝송에 푹 빠졌던 그 시절, 나는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에 몰래 팝송책을 보며 영어 가사를 외우다가 선생님께 걸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간 나를 체벌하는 대신 팝송을 부르게 했다. 그때 내가 교실에서 친구들 앞에서 서툰 영어로 불러댔던 노래는 진추하&아비의『One summer night』, 닐 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 등이었다. 가사를 외우기 쉽고 속도도 빠르지 않아 나름 만만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었다.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 중에서는『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가장 좋아했다.
하교 후 저녁 시간부터 밤까지는 내 방에 콕 틀어박혀 라디오의 팝송 프로그램을 듣느라 공부며 숙제는 뒷전이었다. 심지어 그때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의 청취자 신청곡에 당첨되려면 DJ와 구성작가 눈에 띄게끔 독특하고 예쁜 엽서를 보내야 했는데, 거기 뽑히려고 우리 학교 '그림 지존'인 친구와 함께 시험 기간에도 팝송 신청 엽서를 꾸미느라 밤을 꼴딱 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막내딸이 친구와 열공하는 줄 아셨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열렬히 애청하던 MBC-FM 팝송 프로그램 <박원웅과 함께>에 신청곡이 자주 뽑혀 DJ 박원웅님의 멋진 목소리로 ‘서울 미아리에 사는 OO여고 O학년 신현수 양과 정OO양(지금은 미대 교수가 된 친구라 이름 생략)의 신청곡입니다……’라며 이름이 전국 방방곡곡에 전파를 타고 방송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방송국에서 주최한 <예쁜 엽서 전시회> 에도 우리 엽서가 꽤 큰 상을 받게 돼 서울 정동에 있던 MBC 사옥으로 상도 받으러 가고, '라디오계 오빠 부대 원조' 였던 박원웅 DJ님도 만날 수 있었다.
여고 시절 이렇게 팝송에 미친 결과는…… 결과는…… 당연한 대입 실패와 재수 학원 직행. 하지만 재수 시절에도 1학기 때까지는 여고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원 책상에 책가방을 던져 놓고 툭하면 학원을 탈출, 근처에 있는 음악 다방에 가서 쓴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반나절 이상 죽치고 앉아 유리 부스 속 DJ 오빠(!)에게 맨날 쪽지에 듣고 싶은 팝송을 신청하기 일쑤였으니까. 다행히도 2학기부터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3수생 신세는 면할 수 있었지만…….
이어진 대학 시절과 결혼 초까지도 팝송은 나의 청춘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물론 다른 장르의 음악도 좋아했지만 빛나는 청춘 시절엔 팝송이 가장 나와 가까웠던 것 같다. 팝송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팝송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시절이었다.
뜬금없이 나와 팝송 간의 심오찬란한(!) 관계를 늘어놓게 된 건 뜻밖에도 지난 장마철에 우연한 곳에서 그 시절의 팝송을 만나 가슴 울컥하며 옛 추억에 폭 잠겼기 때문이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어딘가를 다녀오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쉬었다 가려고 한 대형 카페에 들렀다. 그리고 널찍한 2층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비오는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그것은 바로 내가 여고 시절 좋아했던 올드팝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뭐지? 올드팝을 틀어 놓았나?’ 하면서 2층 난간에서 1층을 내려다보니,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여성 트리오가 라이브공연을 하는 게 아닌가. 그 카페에 무대가 있는 걸 보긴 했어도 라이브 공연을 하는 줄은 몰랐는데.
김포의 한 대형 카페에서 만난 여성 트리오의 라이브공연
여성 트리오는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하모니로 내가 여고 시절 이후 즐겨 들었던 올드팝과 우리 가요를 너무나 10곡 정도를 연달아 불러 젖혔다. 비 오는 여름날이었던 만큼 여름, 혹은 비와 관련된 노래들이었는데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그중 우리 가요가 2~3곡, 나머지는 다 ‘oldies but goodies’ 팝송이었다.
신기한 건 그 팝송 중 두 곡 정도만 빼고는 내가 제목은 물론 가사까지 기억하는 노래, 그 중 서너 곡은 아주 좋아하던 노래였다는 것이다. 낸시 시나트라와 리 헤이즐우드의 듀엣곡인 『Summer Wine』, CCR의 『Have you ever seen the rain』, 비지스의 『How deep is your love』 등. 가요 중 한 곡도 내가 젊은 날 많이 좋아했던 우순실 님의 『잃어버린 우산』이었는데, 비오는 날 외국 가수가 카페에서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부르는 『잃어버린 우산』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덕분에 노래에 취해 예정했던 것보다 카페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비와 더불어, 올드팝과 더불어 빛나던 청춘을 추억한 날이었다.
카페에서 옛 추억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1백%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올드팝과 더불어 빛나는 청춘의 한때, 그 아련하고도 가슴 먹먹한 추억을 만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