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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ldmental Nov 20. 2023

내가 하고싶은 일, 다 하고 살자.

예기치 않은 행운과 축복으로 무한한 자유를 만나다.

오늘은 내가 막 만으로 20살이 되었을 무렵이자, 집을 나와 혼자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에 내게 예고없이 찾아왔던 소중한 행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당시 생전 처음 하는 해외여행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정말 낯선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기에 너무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고, 내가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고 대하는 자세 중 "자유"라는 부분에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어 준 사건이다.


"만으로 20살이 되었을 무렵, 
예고없이 나를 찾아온 행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 준비될 무렵, 나는 남아공에 다녀왔다. 다만 고가의 월드컵 시즌의 항공권과 경기 관람권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내 여행은 당시 남아공을 방문한 대부분의 관광객들과는 그 목적이 달랐고, 사실 더 특별했다. 당시 미국 유학 후 국내 영어회화 학원에서 일했던 사촌형이 남아공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지금은 형수님이 되신 아름다운 남아공 백인 여선생님을직장 동료로 만나 몇년 간의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것이다. 고맙게도 사촌형은 나를 초청해주며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주었다.


물론 우리 사촌형도 금수저는 아니기 때문에, 이 초대가 마냥 공짜는 아니었다. 휠체어를 챙겨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수발 역할을 도맡아 하는 동시에, 남아공식 결혼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식인 "Toast Speach" 중 양가 부모님의 축사에 이어 양가 친구나 친척이 하는 축사를 준비하는 미션이 있었다. 그전까지 노인 수발을 해본 적이 없던 나였기에 할머니 수발도 쉽지 않았고, 나름 외고 졸업생으로서 영어회화에 자신은 있었지만, 해외여행이 처음인데다 영어로 중요한 스피치나 축사를 하는 것도 처음이라 긴장도 많이 됐다.


사촌형이 남아공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내겐 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수발 역할과 
친척이 하는 축사를 준비하는 미션이 있었다.


내 첫 해외여행의 경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관광도 아니고, 유학도 아니었다. 나를 위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타인을 위해 달성해야 하는 특별한 미션이 있는 해외여행. 그러다 보니 만 20세의 첫 해외여행지인 남아공에 도착하며, 내게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게 만나는 현지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집중이었다. 일찌감치 어린시절부터 해외여행을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기 때문에, 낯선 나라에 펼쳐져 있는 사회와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알아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휴가보다는 출장이나 현지답사 등의 특별한 미션이 함께하는 해외여행을 다니게 된 것은 그렇게 해외여행의 경험을 시작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게 만나는
현지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집중이었다.


당시 나는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지, 공항에 마중나온 형수님의 가족들 이름을 약 3분 이내 서로 소개하는 첫 만남에, 이름을 들었으면 잊지 않고 바로 외워서 적절하게 불러드리는 것이 실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성공적으로 이름을 외워서 불러드리자 교수님이셨던 형수님의 아버지가 매우 놀라며 본인이 가르쳐본 학생들 중에서도 이정도 똑똑한 친구는 정말 드물다며 나를 다시보시는 모습을 보고 너무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사실 좋은 것은 아니었어서, 내가 하는 영어 표현이 맞는지 확신이 없을 때마다 주변에 쉽게 묻기보다 두세번 사전을 검색해서 확인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 내가 이따금 완전히 의미가 왜곡된 표현을 사용할 때에, 형수님의 가족들이 보기에 내가 다듬어진 표현을 계속해서 잘 쓰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실수라고 생각지 못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한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었다.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지,
 ... 
주변에 쉽게 묻기보다 두세번 사전을 검색해서 확인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때, 남아공 현지에 방문한 우리 가족 전체, 그러니까 사촌형의 부모님과 큰형 부부, 그리고 나와 할머니까지를 살뜰히 챙기던 형수님의 큰오빠가 내게는 첫 귀인이 되어주었다. 결혼식 전날까지 형수님 가족이 사는 도시 이곳저곳을 방문하고 둘러보는 우리 가족의 일정을 함께하며, 가는 곳마다 운전도 해주고 식사와 음료를 책임지는 등 완벽하게 우리 여정을 돌봐주어서, 나는 어린 나이에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어쩔 줄을 몰랐다.


가장 고마웠던 점은 친절하면서도 직설적인 그의 피드백이었다. 지치고 지루해보이는 그에 대한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시도로 내가 던진 *"You look boring." (당신은 지루하게 생겼다) 라는 잘못된 표현을 듣고 잠시 혼란과 불쾌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내가 매우 긴장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챈 뒤로는 내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아 보일 때마다 넌지시 편안하게 "Take it easy." 라고 말해주고 내가 편안하게 느끼게끔 한껏 배려해 주었다.



*당시 긴장한 탓에 이따금 이렇게 말도 안되는 문장을 썼다. 원래는 수동형으로 "You look 'bored'." (지금 지루해하시는 것 같아요) 라고 말문을 열고, "I want to be the one you can talk to comfortably.  You must have been tired taking all the care for our family." (나한테 편하게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우리 가족 전부를 돌보느라 지치셨겠네요) 와 같은 친절한 말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 배려가 매우 효과적이어서, 나는 매번 그의 의도와 노력을 알아채고, 내가 여행 내내 너무 긴장하고 있다는 점을 돌아볼 수 있었다. "Take it easy." 라는 한마디가 그렇게 효과적일 줄이야. 그의 배려가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후 오랫동안 나는 긴장하거나 어려움을 느끼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배려해줄 수 있는 상황이 오면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효과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줄 수 있는 제스처를 취하곤 했다.


"Take it easy." 라는 한마디가 그렇게 효과적일 줄이야.


이렇게 형수님의 큰오빠로부터 배운 태도의 전환도 내게 정말 중요한 귀감이 되었지만, 이 여행에서 내가 얻은 행운과 그로부터 얻은 무한한 마음의 자유는 내가 성공적으로 결혼식 축사를 마친 뒤, 피로연에서 형수님의 이웃사촌들의 테이블을 방문할 때에 정말 놀라운 방식으로,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결혼식 축사를 열심히 진심으로 준비한 보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우리가 방문했던 형수님이 사는 지역이 여행 내내 동양인을 한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동양인의 비율이 매우 적었던 데다 케이프타운의 휴양지에 사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은퇴한 이웃들이 많아서 일상의 심심함을 채울 이벤트가 필요했기 때문인지, 내가 방문하는 테이블마다 거의 한 테이블도 빠짐없이 나를 매우 환영해주며, 다음 남아공에 방문하는 계획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기 집으로 놀러와 머물라는 초대를 해준 것이다.


 "When do you come to South Africa next time?"
 "We have many empty rooms, visit us whenever you want."


이 지역 방식의 립서비스일까 생각해서 조금 구체적으로 물었는데, 단지 환영의 의미로 으레 건넨 말이 아니라 모두 진지하게 초대를 제안하는 거였어서 정말 놀랐다. 내가 방문한 하객 가족들이 최소한 열다섯 테이블은 되었는데, 그렇다면 각각의 집에 한 2주 정도 신세를 지며 머무른다고 했을 때, 형수님 부모님 댁까지 포함하면 거의 1년을 남아공에서 지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당시 나는 이미 지인이나 온라인을 통해 구한 타인의 집에 조금씩 신세를 지며 여행하는 카우치 서핑이라는 여행방식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어렵사리 잠자리를 구하며 다니는 여행이라 끌리지 않는 인상을 받았는데, 수없이 많은 남아공 이웃들이 이미 나를 초대하고 있는 상황에 마주하자 카우치 서핑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좋은 생활을 남아공에서 할 수 있다는 선택지가 그려지며,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엄청난 자유감이 찾아왔다.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하다가 망해도, 최소 1년 간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조건없이 날 환영해주는 낙원이 있다는 것" 이었고, 이것은 앞으로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에 대한 열정과 비전만 확실하다면, 위험을 무릎쓰고 달려볼 수 있는 정신적, 물리적인 기댈 언덕이라는 조건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잠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이러한 생각이 정리되었던 순간부터, 여행에서 돌아온 후의 한동안까지도 내 머릿속과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하나의 결론이 바로 "내가 하고싶은 일, 다 하고 살자." 였다.


"어떤 일을 하다가 망해도, 최소 1년 간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조건없이 날 환영해주는 낙원이 있다는 것"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챙겨야 하는 가치들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책임, 안정과 같은 단어들로 대표되는 삶의 가치들은 우리가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기 어렵게 하는 경우가 참 많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더이상 만 20세의 그날에 예기치 못하게 찾아왔던 내 맘속의 무한한 자유를 조금은 잊고,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생각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모든 것에 정해져 있는 선택지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행복을 가로막고 삶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오래전 나를 찾아왔던 행운과 무한한 자유가 다시 떠올랐다. 진짜 책임감은 모험을 무릎쓸 의지에서부터 나온다는 점, 안정과 균형은 결국 충분히 모험을 극복한 결과로 달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되새겨 보면, 어린 시절 내가 얻은 무한한 마음속 자유와 모험에 대한 의지는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늘어가는 책임의 무게로 인해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소중한 가치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커버 이미지로 등록한 사진은 이 때를 회상하면 떠오르는 Hermanus 해변 Old harbour 의 고요하고 평화로우면서도 정겨운 풍경이다. 오늘도 나는 이 글을 쓰며 한번 더 내 앞에 펼쳐진 삶에 대해 자유로운 모험의 의지를 새겨본다.


Take it easy.
"내가 하고싶은 일, 다 하고 살자."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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