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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Feb 03. 2021

만년필, 노트, 종이책의 공통점

내가 들인 노력만큼의 결과를 얻는다는 것 


#만년필

만년필은 '간지' 말고는 장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필기구이다. 문방구에 가면 질 좋은 볼펜을 아무리 비싸도 3000원이면 살 수 있는데, 만년필은 저렴한 편인 만년필의 가격이 3만 원이다. 비싼 주제에 잉크도 안 들어 있어서 내 돈으로 잉크도 사서 넣어줘야 하고 종이는 또 어찌나 가리는지 만년필로 써도 번지지 않는 비싼 종이를 항시 구비해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쓸 때 편하냐면 그도 아닌 게 혹시나 비싼 촉 망가질까 애지중지하며 손에 힘 빼고 살살 써야 하고 잉크 다 마르기 전에 손을 댔다간 다 번져버리기 일수다.


#노트

대학생의 삶의 질은 아이패드 6세대가 출시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무거운 책과 프린트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면서 수업을 들어야 했던 대학생은 이제 더 이상 자료를 프린트하지 않는다. 책을 스캔해 태블릿에 넣고, 수업자료는 pdf 받아 바로 태블릿에서 필기한다. 태블릿으로 필기를 하면 내가 원하는 데로 사진과 그림을 넣을 수 있고, 필기 중간에 페이지를 삽입할 수도 있고, 링크를 걸어 둘 수도 있고, 물리적인 제약도 무게도 없다. 그에 비해 종이 노트라니, 공간은 공간대로 차지하는 주제에 쓰다 보면 손은 아프지, 찾고 싶은 내용이 있어도 검색도 못 하지, 중간에 내용 추가도 못하지 눈이 덜 피곤하다는 거 말고는 장점이 하나도 없다. 


#종이책

덕질의 끝판왕은 부동산이라는 말이 있다. 종이책을 구매하면 책 가격이 비싼 것도 문제지만 도저히 책을 쌓아둘 공간이 없다. 여기서 책을 한 권 더 샀다가는 내가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지경이다. 그에 비해 이북은 가격도 싸, 구독제도 있어, 공간 차지도 안 해, 밖에 들고 다니면서 읽기도 좋아, 검색도 할 수 있고 하이라이트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단점이랄 게 없다. 예전에는 이북을 오래 보면 눈이 아프다는 게 큰 단점이었지만 요즘은 이북리더기가 좋아지면서 그런 단점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만년필로 노트에 글을 쓰고, 종이책을 읽는다



집에 형형색색의 볼펜이 쌓여있고, 태블릿과 노트북도 있고, 이북리더기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만년필로 노트에 글을 쓰고 종이책을 읽는 것을 즐긴다. 


내가 이런 시대를 역행하는 취향을 가지게 된 이유에는 내가 근본적으로 아날로그 인간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들인 노력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내가 들인 노력만큼의 결과를 얻는다는 것 



어린 시절 결과란 내가 노력한 만큼 나오는 것이었다. 줄넘기를 연습하면 줄넘기를 잘하게 되고, 일찍 자고 밥 많이 먹으면 키가 크고, 착한 일을 하면 용돈을 받고. 우리는 들어간 인풋만큼의 아웃풋이 나오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았다. 어른들도 우리에게 노력한 만큼 얻을 거라고,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들어간 노력만큼의 결과를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때로는 내가 들인 노력보다 한참 못하는 결과를 받았고, 때로는 내가 들인 노력보다도 훨씬 큰 결과를 받았다. 


인풋과 아웃풋의 상관관계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풋과 아웃풋의 함수관계가 1차 함수인지, 지수함수인지, 로그함수인지는 나의 선택권이 아니었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결과가 나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 그때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더 괜찮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노력을 유형의 물질로 보여주는 아날로그를 좋아했다. 나는 대학교 시험기간이면 항상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필기한 수업자료를 워드로 요약해 프린트한 후 그 프린트 자료만 들고 다니면서 공부했다. 공부를 시작할 때는 빳빳했던 프린트가 시험이 다가올수록 너덜너덜하고 지저분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만큼 노력을 했어, 그니까 나는 시험을 잘 볼 거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이건 결코 태블릿으로는 얻을 수 없는 위안이었다. 


나는 만년필 중에서도 안에 들어간 잉크를 볼 수 있는 투명한 만년필(데몬이라고 부른다)을 좋아한다. 만년필에 좋아하는 색의 잉크를 가득 채워놓고, 만년필을 쓸 때마다 잉크가 줄어드는걸 눈으로 보는 게 좋다. 충전해 놓은 잉크를 다 쓰면 내가 이렇게나 많은 글을 썼구나 뿌듯해하며 만년필을 세척하고 다시 잉크를 채워 넣는 과정을 좋아한다. 


만년필로 글을 쓸 때 노트패드를 쓰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제본된 노트를 사용하는걸 더 좋아한다. 내가 한 자 한 자 글을 쓸 때마다 노트에 남은 칸이 줄어들고, 페이지가 넘어가고, 노트 두께를 보며 내가 얼마나 썼나 노트가 얼마나 남았나 가늠해 보는 게 좋다. 노트를 다 쓰고 나면 깨끗했던 노트가 손때를 타 지저분해지고, 홀쭉했던 노트가 두툼해지는 게 좋다. 


나는 이북리더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종이책을 사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오는걸 더 좋아한다. 종이책을 넘길 때 나는 책 내음을 좋아하고, 한 장 한 장 손으로 넘기는 느낌을 좋아하고, 책을 읽다가 얼마나 읽었나 얼마나 남았나 두께로 가늠해 보는 것도 좋아한다. 


만년필, 노트, 종이책의 공통점은 모두 내가 한 노력만큼의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만년필의 잉크는 내가 쓴 만큼만 줄어들고, 노트 페이지는 내가 작성한 기록만큼만 줄어들고, 종이책은 내가 읽은 만큼만 넘어간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세상에서 내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는 물건이 있다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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