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선택되기 위한 과정
내가 사장이 아니라 회사에 고용된 디자이너라면, 사실 디자이너로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을 수 있다.
내 디자인이 최소한 사장이나 디자인 의사결정권이 있는 상사에게 보고라도 되려면
스케치 품평-> 렌더링 품평-> 디자인목업 품평-> 프로토타입 품평
※제품 디자인을 기준으로 했지만 실내디자인이나 광고 등 다른 디자인도 위와 마찬가지로 여러 단계의 디자인 품평과 검증 과정을 가진다.
등 최소한 3~4 디자인 품평 단계를 거쳐야 한다.
회사에 디자이너가 나 하나가 아니라 몇 명에서 수십명이 있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정말 전쟁이다. 스케치에서부터 내 아이디어와 디자인이 좋아야 그 다음단계에 도전할 수 있고, 거기서 탈락하면 내 디자인은 없어진다. 아예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게다가 회사가 작은 규모면 그나마 거쳐야할 직급의 관문이 적겠지만, 웬만한 중견기업 이상은 위의 디자인 프로세스에 더해서 윗분들의 크리틱과 수정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단계는 아래와 같다.
사원->대리->과장->그룹장->팀장->실장->센터장
이러한 단계를 거쳐 수정을 해야 한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 내 원래 디자인의 흔적은 점점 찾기 어려워진다.
소규모 회사는 위의 직급 단계 중 몇 개는 생략될 수 있겠지만, 회사 특성상 디자인과 상품기획, 마케팅 등 다른 팀들과 업무 경계가 흐리기 때문에 엉뚱하게도 디자이너 문외한에게 디자인 평가를 받고 수정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큰 회사 작은 회사를 막론하고 회사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한데, 직급이 높은 다른 분야의 사람이 디자인에 감 놔라 배 놔라 해서 디자인을 바꾸는 일이다.
실제로 나도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지만 종종 디자인 문외한인 고위직의 요구로 디자인을 수정한 경험이 있다. 디자인 센터장 직급과 맞먹는 다른 수많은 부서장과 부회장급의 지시에 의해서다.
그런 분들이 미적 감각이 있거나 디자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면 너무나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은데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일부는 주관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직급을 내세운 수정지시 요구는 거절하기가 참 어렵다.
말하자면 나를 해고할 수도 있고 승진시킬 수도 있는 직장 상사가 요구하는 것을 내가 싫다고 해서 거절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끄적거린 썸네일 스케치(Thumb nail sketch)의 훌륭한 디자인 아이디어를 보면서 활기차게 토의하고 웃으며 아이디어 발전시키는 이상적인 디자인 과정은 현실에서 드문 일이다.
그것보다 익숙한 일은 거의 완성되거나 진행중인 디자인을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수정시키는 직장상사의 지시이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나도 나의 거친 아이디어 스케치가 직장 상사에게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고용된 디자이너니까 그 작은 스케치를 스캔해서 정성스럽게 다시 더 필력 좋은 스케치로 발전시키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다시 렌더링을 하고, 또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3D 모델링과 디자인 목업 (Mock-up)과정을 거쳐 열심히 디자인을 다듬었다.
그리고 결국 그 스케치들이 내가 계획했던 방향으로 시장에 나올 수 있게 했다. 물론 그 과정은 험난 했지만 결과물을 보면 그 동안의 고생은 마치 추억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은 적당히 잊을 수 있어야 더 행복하게 살수 있는 것 같다.)
디자인은 좋은 아이디어나 한 장의 훌륭한 스케치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디자인을 위한 첫 단추일 뿐이다.
내가 디자인 실무를 많이 경험할수록 디자인의 아이디어 못지않게, 그것을 실질적인 디자인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고 그 것이 디자이너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터넷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각종 아이디어들은 넘쳐나지만, 그것을 잘 필터링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디자인으로 실제화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디자이너는 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결제 단계를 통과시켜 초기의 멋진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도 월급 받는 디자이너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그 때문에 회사에서 일하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러한 진행 능력으로 회사 업무 성과의 많은 부분을 평가받기도 한다.
초기의 디자인 시안을 보면 대부분 다 장점이 있다. 잘 만들면 멋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만들었을 때 느낌은 꽤 달라진다. 기대보다 더 멋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심플하고 코너가 라운드진 스마트 폰을 보자. 그 모양은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심지어 비슷한 디자인의 휴대폰이 아직도 시장에 쏟아지고 있지만, 그 누구도 1세대의 아이폰처럼 심플하고 임팩트 있게 만들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휴대폰 디자이너들이 회사의 수많은 결제 관문을 거치지 않고 감각 있는 Chief designer와 CEO에게 직접 품평을 받았다면 애플 같은 디자인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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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럴 껄?’에 손을 들겠다.
나도 험난한 디자인 과정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대로 디자인 수정하고 보고 한 뒤 집에 가면 아마 몸은 더 편했을 것이다. 결과는 별로더라도.
그런데 그게 싫었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라지만 내 소신은 변치 않고 싶었다. 조직은 개인이 이길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이기진 못하더라도 흡수되지 않고 최소한 ‘나 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더 많이 일해야 했다. 직장 상사가 원하는 디자인과 내가 원하는 디자인이 다르다면?
그것들의 장점을 합친 또다른 디자인을 제안했다. 그래도 의견이 다르다면? 또 제안했다.
나는 눈치를 보거나 자존심을 굽히고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일과 디자인에 나의 체력과 시간을 희생시키고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최대한 구현하려고 한 셈이다.
회사에서 수많은 절차와 디자인 과정을 무시하거나 건너 뛰긴 어렵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효율적으로 나의 디자인을 어필 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것은 빨리 찾을수록 유리하다.
그래야만 수많은 결제 단계를 거치더라도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