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실제 업무 프로세스
디자인에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어떤 디자인 업종이든지 실제 디자인 작업을 할 때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업무 프로세스를 거치게 된다.
디자인 업무 초기에는 다양한 리서치와 브레인스토밍, 아이디어 스케치 단계를 거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자인 될 상품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디자인할 방향의 맥락을 잘 짚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잘 짚어내야 성공적인 디자인 과정과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지기 때문에 초기 단계에서 창의적인 핵심 아이디어를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 될 수 있도록 디자인 한다.
그 다음은 디자인 발전 단계이다. 초기단계에서 나온 여러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다양하게 발전시켜본다. 예를 들면 휴대폰 디자인을 위해 직사각형에 R(Radius)을 적용하기로 초기단계에서 결정했다면 그 직사각형의 가로,세로,높이를 각각 어떤 비례와 수치로 할지 결정하고 R값을 크게 할지 작게 할지 등을 각각 렌더링이나 프로토 타입 등 다양한 샘플을 만들어 검증해 보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디자인팀 내부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디자인 시안을 경영층이나 디자인의뢰인(Client)에게 품평 받고, 실제 제품화 할 수 있도록 엔지니어와 협업하여 최대한 초기 디자인 컨셉과 비슷한 제품으로 만든다.
위의 디자이너가 실제로 디자인 업무에서 하는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디자인을 위한 리서치
2. 참신한 아이디어를 위한 브레인스토밍
3. 창의적인 아이디어 도출
4. 아이디어를 스케치나 렌더링 등으로 디자인 시각화.
5. 적절한 프로그램을 이용한 프로토타입 제작 및 디자인 구현
6. 품평을 위한 프리젠테이션
7. 상품화를 위한 엔지니어와 협의 혹은 협상
과거의 우리나라 디자인학과나 기업에서는 위의 디자인 단계 중 ‘4.아이디어를 실제 디자인으로 시각화’ 단계를 다소 중요하게 여겨서 입학이나 입사 시험 때 드로잉(drawing) 실력을 보고 당락을 판별하곤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2,3번 단계를 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추세이다. 해외의 디자인 선진국들처럼 말이다.
내가 대학 졸업 직후에 이탈리아에서 제품 디자인 인턴쉽을 약 4개월간 했는데, 현지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해보니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아무 의미 없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한국인 디자이너는 나 뿐이었고, 이탈리아, 영국 스웨덴 출신 디자이너들이 섞여 있었다. 그 중 드로잉 실력이 뛰어난 친구는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중 1명 정도?
나머지는 드로잉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디자인 Ideation(관념화), Brainstorming을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데 능숙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디자인 컨셉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디자인 학교에서도 그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고 했다. 당시의 국내 대학교 시스템과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는 과정 보다는 결과로 평가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간 과정이 허술해도 마지막에 좋은 아웃풋을 들고가면 A 학점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같이 일했던 유럽 디자이너들은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교수진들이 학생들의 아이디어의 발전 과정, 창의성을 매우 중요시하며 디자인 중간과정에서 그 것들을 보여주지 않으면 학점을 받을 수 없다고.
내가 인턴을 하는 동안 유럽 디자이너들이 일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은 디자인 과정에서 각자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방법도 디자이너마다 제각각이었다. 스케치에 능숙한 디자이너는 스케치로 아이디어를 소통했고, 신기한 자료 찾는데 능숙한 디자이너는 리서치한 자료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해서 디자인 회의 때 설명했다.
그리고 스케치는 능숙하지 않지만 3D 감각이 좋았던 스웨덴 디자이너는 정말 본인만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의 스케치를 대충하고는 Alias(3D프로그램)로 바로 디자인 모델을 만들어서 그것을 보여주며 우리와 이야기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디자인 품평 마감일이 다가오면 그들도 한국의 워커홀릭 디자이너들과 다르지 않게 자신들이 만족하는 수준의 작업물이 나올 때 까지 밤늦도록 일하곤 했다.
그들은 자유롭고 즐겁게 일하면서도 책임감이 있어 보였다.
아,,,그래서 유럽이 디자인 선진국인가? 당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가 2005년이었으니 꽤 오래 전이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도 디자인 인식이나 환경이 참 많이 변해서, 다소 중요성이 경시되었던 디자인 중간 단계인 브레인스토밍이나 창의적 아이디어 도출 단계가 이전보다 많이 존중 받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디자인의 창의성을 좌우하는 단계가 예전보다 존중받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디자인도 이제 미투(Me too) 전략에서 벗어나 지적재산권을 주장할 만한 ‘디자인다운 디자인’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우리는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를 비난하지만, 사실 얼마전의 우리나라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디자인 수준이 높아진 만큼 이제는 새로운 발상과 창의적인 Ideation(관념화) 능력을 가진 디자이너가 아니면 좋은 디자이너로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좋은 디자인을 다른 사람들에게 세일즈 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다른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결과물과 비교해서 나의 디자인을 더 돋보이게 프리젠테이션하고 세일즈 하는 능력 말이다.
제품이 너무 훌륭해서 그 자체로 돋보일 수 도 있지만 내가 열심히 하는 동안 다른 디자이너들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일정 수준 이상 퀄리티의 디자인을 제안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디자인한 것이 중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도록 열심히 품평권자를 설득해서 내 디자인이 관철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면 내 디자인이 현실적인 기술이나 가격의 제한때문에 엉뚱한 디자인으로 바뀌지 않도록 엔지니어들과 열심히 소통하고 조율해야 한다. 디자이너들이 이것을 신경 쓰지 않거나 조율에 실패하면 간혹 초기 디자인과 전혀 다른 최종 디자인제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 단계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실제 나의 디자인 결과물과 마주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디자인했던 제품이 처음으로 시장에 나왔을 때 너무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더 스케일이 큰 다양한 제품을 양산했지만 처음 디자인 했던 제품이 시장에 출시 되었을 때 만큼 신이 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론을 처음으로 실전에서 성공시킨 경험이어서 그런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