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역사 선생님이 정말 제대로 보고 싶은 책이 있을 때는
번역을 하면서 읽는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가 듣고, 읽으면서 '이해했다'라고 했던 생각이 번역과 통역을 하면서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 알게 된다.
충분히 이해한 줄 알았던 책의 문장 하나를 번역하는 데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 단어는 무슨 의미로 쓴 것일까, 이 접속사는 왜 여기에 두었을까...
한 문장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통역이 끝나고 나올 때 직원분들이 가끔 신기해하면서 묻는 말이 있다.
'통역사님은 저희 대표님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 이해하세요?'
대표님은 회사의 모든 부분을 총괄하고 모든 사항에 검토와 최종 결정을 해야 하다 보니
머릿속이 늘 복잡하고, 모든 일들이 빠르게 돌아간다.
그러다 보니, 앞뒤 설명 없이 포인트만 말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으니 대표님의 말하는 전체상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옳고, 누가 맞다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역할이 너무 달라 서로의 생각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통역사는 대표님이 이야기를 할 때는 대표님의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직원분이 말할 때는 직원분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려고 노력한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는 처음 만난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다.
하지만 통역을 할 때는 그런 나는 사라진다.
손으로는 듣고 있는 이야기를 적고, 나의 시선은 상대방의 눈과 입에 고정되어 있다.
눈과 입을 보고 있는다고 더 잘 들리는 것도 아닐 텐데,
상대방의 눈과 입을 보면서 듣고, 적고, 생각한다.
무슨 말일까?
왜 이 말을 하는 것일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우스갯소리로 회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는 사람은 통역사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회의를 하든, 수업을 듣든, 몇 시간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집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통역사는 그것이 몇 시간이 되든, 단 한순간도 다른 생각을 할 수 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정말 아주 잠깐 '펜을 다른 걸 가져올걸'정도의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중요한 단어를 놓칠 수 있다.
그래서 회의 내용을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도 통역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역사 자신이 모든 내용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통역사는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내가 들은 것이 맞는지,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내가 지금 생각한 대로 말을 했는지...
박사 수업 중에 들었던 기억 하나가 기억난다.
어떤 한 교수님이 '번역사들은 이해했다는 말을 하는데 정말 이해한 것이 맞아요? 그것이 맞다고 어떤 기준으로 알 수 있죠?'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읽고, 이해해서 번역한 자료에 대해 그 원작자에게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방지게 '이해했다'라고 생각했고, 말했다.
이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