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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Mar 31. 2024

여보, 큰일 났어! 세 쌍둥이래.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남편은 딩크였다. 그걸 본인도 몰랐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가 생긴 후에 본인이 딩크였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다.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서 가장 먼저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뭐가 큰일 났냐고 했더니, 아이를 키우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는지 은퇴는 얼마나 늦어져야 하는지를 자기도 모르게 계산하고 있더란다. 본인의 그런 모습을 깨닫고 스스로도 깜짝 놀라 '아이를 원한 게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미 아이가 생긴 후 깨달은 가족계획. 나는 원했고 남편은 원하지 않은 임신이었기 때문에, 반응은 미적지근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남편들처럼 축하한다고, 너무 잘했다고 어화둥둥 우리 아기란 말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임산부 유세를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쁨과 축복을 건조하게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남편은 임신한 아내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게 아침이든 밤이든 사러 갔고 내가 아프다고 하면 열일 제쳐두고 총알같이 달려왔다. 최선을 다해 나를 보필했지만, 아기에 대한 기대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죽하면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우리의 삶은 소중하다', '부부 중심으로 살자'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나 바뀌는 걸까 그의 말들에 두려움이 더 커졌던 것도 같다. 그리고 남편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당시엔 그게 그렇게나 서운했다.  




2014년 2월에 임신인 걸 알았고, 3월은 입덧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한 달을 보냈다. 컨디션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곡선이었다. 어느 날은 배가 꼬일 듯이 아파서 갑자기 병원에 다녀오고, 또 어느 날은 입덧이 너무 심해 탈진할 것 같아 병원에 다녀오고. 임신 초기엔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 신세를 졌다. 내 컨디션과 반비례하여 그때마다 아기는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날은 오랜만에 컨디션이 좋았다. 정기 진료 때문에 혼자 병원에 갔다. 진료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보다가 그날이 만우절이라는 걸 알았다. 병원도 왔겠다, 남편이 내가 병원에 왔다는 것도 알겠다, 지금껏 내가 느꼈던 이 서운함을 한방에 날려버릴 거짓말이 떠올랐다. 직접 얼굴 보고 하는 거면 금방 들킬 테지만, 전화로 하는 거니까 표정관리가 안되어도 안 들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웃음 꾹 참고 심호흡 한 번 하고. 거짓이 아니라 진짜라고 머릿속에 주입하고. 무사히 진료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동안도 계속 생각했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여, 실제 상황이여.


"여보. 큰일 났어."

"왜, 오늘 병원 갔다 온 날 아니야?"

"어, 맞아."

"왜 무슨 일이야? 병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상태가 안 좋아?"

"하, 어떻게 하지...?"

"왜? 왜 그래?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니, 잘 들어봐. 진짜 큰일 났어."

"자꾸 뜸 들이지 말고 얘기를 해봐, 얘기를."

"쌍둥이래."

"......(한숨)"

"여보, 어떡해? 여보? 살아있는거지?"

"......(또 한숨)"


내 말을 믿는다. 그것도 너무 믿어서 한숨에 또 한숨, 실어증에 걸린 듯 말을 잇지 못하는 남편이다. 짠하기도 했지만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꿀잼이다. 이쯤에서 수습을 해야 할까, 아니면 한 발 더 나가볼까. 이제 시작인 것 같아 여기서 끝내긴 좀 싱거운 감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거짓말이 허용되는 날이 아닌가. 한 발 더 나가면 눈치채겠지? 눈치채면 하하 호호 웃으며 만우절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될 일이다. 설마 눈치를 못 채겠어? 빠른 생각정리를 마치고 다시 쌍둥이 임산부에 빙의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좋아, 한 걸음만 더 떼보자.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아기집이 지금은 두 개 보이는데, 또 분열할 수도 있대. 분열하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으래."

"뭐라고??? 이게 말이 돼?"

"몰라, 나도. 아기집 하나가 뒤쪽에 있어서 안 보였다나 봐. 근데 또 분열하면…"

"하 이게 무슨…"

"어떡하지, 여보? 우리 어떡해? 세 쌍둥이가 될 수도 있다는데."

"……(한숨)"

"뭐라고 말을 좀 해봐. 너무 놀래서 나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나 일단 일 좀 하고, 이따 통화하자."


공들인 헛소리들이 내 입에서 나불나불 새어 나온다.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인 셈. 쌍둥이인 아기집은 왜 이제야 보일 것이며, 임신 3개월까지 무슨 세포분열을 하고 있을 것이며 그게 또 세 쌍둥이로 분열한다니, 내가 말하면서도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세포는 태아가 된 지 꽤 되었을 거고, 아기집이 생기려면 진작에 더 생기고 보였어야 했겠지, 남편의 뇌는 이미 생각을 멈춘 지 오래였다.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모르는 상태. 머릿속이 전부 휘발되어 이상하다는 감정조차도 못 느낄 만큼 당황했나 보다. 이런 다 보이는 거짓말을 1만큼도 눈치 못 채다니.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세 쌍둥이까지 나간 건 절대 안 믿겠지 싶어서였는데. 말하는 족족 다 믿어서 나도 당황하여 수습할 타이밍을 놓쳤다. 세상 계산 빠르고 재고 따지는 줄 알았더니, 놀라울만치 순진한 남자였다. 웃음을 꾹꾹 눌러 참느라 갈라진 내 목소리는 울음을 참는 것처럼 들렸다. 자꾸만 새 나오는 웃음을 가리려고 심호흡하는 소리는 마치 한숨소리 같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거짓말에 신뢰를 더해주었다. 거기에 당황스러움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연기는 실제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내 연기력이 이 정도였다니. 배우를 할걸 그랬나?


남편의 오후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떻게 수습하지 고민하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한두 시간 그냥 두기로 했다. 왠지 바로 "거짓말이었어, 짜잔." 하기는 좀 무서웠다. 이미 일이 커져버렸다. 남편은 원래 일하다 잠깐잠깐 쉬는 시간에 전화를 자주 하는 사람이어서, 전화가 오면 얘기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전화가 없었다. 남편의 퇴근 시간쯤 되자 초조해진 것은 내 쪽이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다.


"괜찮아?"

"응.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까, 생각이 정리가 됐어. 어쩔 수 없지, 뭐."

"어이구 그랬어? 좀 진정이 된 것 같아 다행이네."

"그래도 한숨이 나오긴 한다. 다음 병원 가는 날이 언제야? 아니다, 그냥 낼모레 나 쉬는 날 같이 병원 가서 다시 물어보자."

"여보, 근데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

"여보세요? 전화 끊은 거 아니지?"

"와 진짜, 진짜 너무하네!! 나 직원들한테도 다 얘기했는데."

"미안해. 근데 이상한 거 눈치 못 챘어? 무슨 세포분열을 아직까지 하고 있겠어?"

"진짜 너무하잖아!!! 근데 진짜 거짓말인 거 맞지?"

"응 거짓말이야, 거짓말. 다 거짓말."


남편은 세 쌍둥이의 당황스러움을 직원들과 공유하며, 직원들에게서 위로를 듣고 눈물이 날 뻔했다고 한다. 배가 침몰하는 듯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남편을 보고, 아무도 만우절을 떠올리지 못한 듯했다. 둘이 될지 셋이 될지 알 수 없는 미궁 속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느라 오후 시간이 다 지나갔단다. 분명 딩크였는데 자식이 한번에 줄줄이 사탕처럼 생기다니. 너무너무 힘들고 막막했다며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책임감 강한 남자의 오후를 망쳐버린 게 너무 미안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거짓말이 맞다고 두 번 세 번 안심시켜 주었다. 그리고 임신했을 때 그의 반응을 이제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그 자리에서 맹세했다. 오늘로 과거의 잘못들은 다 청산하자는 우리의 거래는 무사히 타결되었다.




다음 해 만우절. 육아에 지친 남편을 속일 거짓말이 머릿속에 또 한 번 두둥실 떠올랐다. 어쩌지, 거짓말 안하려고 했는데 벌써 도파민이 샘솟고 입이 간질간질하다. 난 너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나 봐. 내 즐거움이 먼저인가, 남편의 마음을 지켜주는 게 먼저인가.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나 만우절엔 거짓말을 해야 제 맛이지. 대신 이번엔 지난번처럼 거짓을 고백하는 데 오래 시간을 끌지 않기로 한다.

"여보, 큰일 났어. 테스터기를 했는데 두 줄이야. 둘째가 생긴 것 같아."

"뭐라고??"

또 믿는다. 멘붕이 온 말투가 핸드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쏠랑 쏠랑 잘도 넘어가는 순진한 이 남자, 큰일이다. 밖에서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겠지? 한 시간만, 딱 한 시간만 지난 후에 진실을 알려줄게.

미안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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