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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Mar 20. 2024

첫사랑을 질투한 남편과의 숨 막히는 하루

이기고 싶다, 격하게 이기고 싶다

남편이 평일 하루 쉬는 날은 아이 없이 데이트하는 날이다. 그날은 주로 브런치를 먹으러 가거나 카페에 간다. 뭐, 가끔은 미술관도 가고 날이 좋을 땐 산책하면서 이야기도 한다. 둘만의 시간을 오롯이 보낸다. 그는 말이 많다. 쉴 새 없이 말한다. 아마 종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터에서 꾹 다문 입을 내 앞에서 봉인해제한다. 신이 나면 더 나불거리는 사랑스러운 입. 하지만 그의 입은 눈치가 없다. 내가 전화통화를 하고 있을 때도, 글 쓰느라 집중이 필요할 때에도 자기 말을 하고 있다.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면, 그제야 입이 겨우 다물어진다. 나와 함께하며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그에게는 힐링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며칠 전 데이트하던 그날, 함께 샌드위치를 먹다가 핸드폰 알람이 와서 확인하니 '조회수가 몇천을 돌파했다'는 브런치의 알람이었다.

"여보, 있잖아. 며칠 전에 글을 썼는데, 그게 좀 인기가 있었나 봐."

여기까지 말하고 슬쩍 눈치를 살폈다. 왜 이게 눈치가 보이는고 하니, 사정이 있다.



#1. 그의 포지션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글의 소재가 주로 남편이었다. 때문에 글이 너무 내 위주로 치우쳐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우가 있었다. 글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기억이 서로 일치하는지 확인했고, 거기에 그의 객관적인 평가가 조금씩 더해졌다. 그러다 보니 글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글 보여주는 게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글 쓰는 아내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원하는 게 냉정한 평가라는 걸 깨닫고는 포지션을 살짝 틀어 비평가 혹은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글 쓰는 사람은 아니므로 어떻게 고칠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지만, 다독가로서의 시선과 평가는 출간작가 저리 가라여서 방향을 잡는데 꽤나 도움이 된다.


단, 눈치 없는 입에서 어떤 촌철살인의 담대한 말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야 한다. 객관적이고 냉정하며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하기도 하다. 정신줄을 놓았다간 하마터면 말에 베일 수도 있다. 좀 더 조미료를 팍팍 아낌없이 쳐봐, 이 부분은 빼는 게 어때? 병맛이야, 이 부분은 더 과장을 해봐, 과장을 할 거면 제대로 과장을 해, 이 부분은 오글거려 죽을 거 같아, 뭐 지난번보다 좋아지고는 있어, 하지만 아직 너무 잔잔해, 사람들이 막 읽고 싶은 글은 아니야, 본인을 너무 미화시킨 거 아니야? 좀 더 솔직해져 봐, 글의 소재가 너무 다 주변이야, 책 좀 읽지 그래? 등등 맨 정신으로 듣다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아침 드라마 대본을 바라는 건가도 싶지만, 어쨌든 나와 다른 시선을 갖고 있는 그의 평이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니까. 거기에 중독이 되었는지 요즘은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온갖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로이 다하는 그대는(팬인지 안티인지 헷갈리는) 나의 1호 독자.



#2. 그녀의 사정

지난주 글은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제목이 무려 “결혼식장에 갔다가, 첫사랑을 마주쳤다.”인데 아무리 남편이 편집자의 시선으로 내 글을 본다고 해도 아내의 첫사랑 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먼저 내가 남편의 첫사랑 얘기를 구구절절하게 읽었다고 상상해 봤다. 남편의 첫사랑, 당연히 있어야지. 그런데 구구절절한 사연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아마 남편도 비슷한 마음 아닐까?


그리고 또, 글 얘기를 하려면 지난번에 갔던 결혼식장에서 첫사랑을 마주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미 지나간 얘기를 또 끄집어내야 하는 것부터가 불편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서로의 과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글로는 쓰고 싶었던 이유는 그날, 내 첫사랑이 증발한 만큼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써서 올렸고, 그게 우연히 관심을 끌었다. 함께 있을 때 알람이 울리면서 우리의 시선은 함께 내 핸드폰으로 향하게 되었고. 시력, 특히나 숫자에 대한 시력은 몽골인처럼 발달한 그가 몇천이라는 숫자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인기를 끈 나의 글이 뭔지 당연히 궁금해할 것이었다. 다른 글은 아무렇지 않게 다 보여주는데, 그 글만 안 보여주기도 그래서 말을 꺼낸 거다. 글을 볼지 안 볼지는 그의 선택이고.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3. 숨 막히는 반나절

"그게 뭔데? 나한테 왜 안 보여줘?"

"그게 말이야. 보여주기 좀 그래서. 근데 원하면 보여줄 수는 있어."

"뭔데, 뭔데? 뭔데 그래?"

"첫사랑"

찰나의 순간,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동공이 커진다. 눈썹이 꿈틀거리고, 표정이 애매하게 바뀐다. 샌드위치를 먹던 손과 입이 '그대로 멈춰라!' 놀이를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동작 그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는 것. 우리 함께 있을 땐 오디오가 빈 적이 없었는데, 처음 느껴보는 적막한 분위기와 고요한 세상. 사뭇 어색한 공기가 신선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스치며, 당황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이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이야'하는 생각과 동시에 무뚝뚝한 말투로 그가 입을 연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데, 내가 보고 싶어 지면 얘기할게."

"그냥 글이야, 다른 글이랑 마찬가지로. 별거 없어."  

왠지 변명처럼 들리는 내 말이 더 이상하다.


샌드위치를 먹고 이동하는 길, 마시던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들고 가던 남편의 커피 뚜껑이 갑자기 종이비행기처럼 굴곡을 그리며 날아가 저 앞에 착륙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웃음이 빵 터졌다. 서둘러 커피 뚜껑을 주으러 가다가 커피도 쏟아지고 그 덕에 옷 앞쪽이 젖어버린 남편도 함께 웃음이 터졌다. 원래도 뭘 잘 흘리고 날아가고 부서지고 이런 일들이 많아 그때마다 놀리기 일쑤였는데, 그날은 왠지 그의 무뚝뚝함과 대비되어 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 사춘기 여고생들처럼 웃다 보니, 그새 마음이 풀린 남편이 말했다.

"여보, 나 매력 있지? 나 같은 남자 없지?"

"그럼. 아주 차고 넘치지."

단순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조하고 났더니, 뜬금없이 시작한 매력 어필 타임.


"봐봐. 나만큼 쓸모 있는 남자도 없어.(읭?) 얼마나 활용도가 높아.(갑자기?) 열심히 일하지, 아들이랑도 잘 놀지, 여보가 뭐 하라고 착착시키면 바로 움직이지. 일주일에 한 번은 부인과의 시간도 꼭 빼놓지. 요샌 시키는 대로 운동도 하잖아! 내 팔뚝 좀 봐볼래?"

지나가던 길 한가운데에서 길을 막고 서서,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작고 귀여운 근육 자랑을 하고 싶어 한다. 제발 길 막지 말고 조용히 좀 하라고 손사래를 치며, 팔을 걷으려는 손을 황급히 잡아끌고 데리고 나왔다. 대체 왜 저런고 하니 글 때문인 것 같은데, 이제 시작이로구나. 터져버린 입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과연 막을 수는 있을는지 고민이 된다.



인구 밀집도가 현저히 낮은 밖으로 피신을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기서 마음껏 떠들어라 하는 마음이었다. 마치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를 놀이터 데리고 나가는 엄마의 심정으로. 곧이어 시작된 무시무시한 말폭격들.

"봐봐, 여기 있는 남자들 중에서 내가 제일 잘생겼네. 어때? 잘생긴 남자랑 함께 걷는 기분이?"

"어어, 남자들이 없는 것 같긴 한데. 뭐, 너무 좋지."

"들어봐.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 우리 가게에 5살짜리 꼬맹이 손님이 왔었어. 엄마랑 이것저것 사고 나가면서 나보고 '잘생긴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라고 했다?"

"꼬맹이가? 어이구, 좋았겠네."

"내가 계속 운동하면 더 멋있어질걸? 긴장해야 돼, 여보. 나 요새 장난아니야.“

"뭣이라?"


역시나 이상하다. 평소에도 내가 A를 말하면 A'로 대답했고 자기 말이 대화의 70-80%를 차지하는 남편이었지만, 그날은 불도저처럼 온통 한 가지 주제로만 대화를 이어간다. 회춘을 한건지, 20대 철없는 남자애가 내 앞에 등장한 듯했다. 이런 면이 있었다고? 그건 남편 본인도 눈치못채고 있는 질투(?) 탓인 것 같은데,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면 펄쩍 뛰면서 더 이상한 말을 할까 두려워 마음속에 고이 접어 간직하기로 한다. 그저 다 지나가겠지.


"봐봐"로 시작하는 비슷한 매력어필 타임이 반나절동안 이어졌다. 뭘 자꾸 보라는 건지, 그의 앞엔 로봇이 된 한 지친 여인이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발걸음은 자꾸만 백스텝으로 서서히 그에게서 멀어지고 코로나 때도 안하던 거리 두기를 실천한다. 여인은 금쪽이 엄마의 심정이 되어 반야심경도 외워보고, 주기도문도 외워보지만, 그의 입은 지칠 줄을 모른다. 아니, 그런데 20년 전 첫사랑이 뭐라고 이럴 일인가! 별거 없는 서로의 과거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얘기는 왜 해가지고 이런 사달을 만들었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이런 후폭풍은 예상 밖이었다.



#4. 정면돌파

집에 돌아와 쉬다가 또 입에 모터를 달고 다가오는 남편에게 저리 가라고 손짓하며 차분히 생각을 해봤다. 글을 다 보여주면 안 될 것 같고, 마지막 부분만 보여줄까? 굳이 안 보겠다는데 보여줘야 하나? 보여주면 차라리 이상한 말을 덜 하지 않을까? 그냥 처음부터 싹 다 보여주고 폭풍 같은 하루를 보내고 끝낼까?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루종일 말폭격에 당해 단호박처럼 얼굴이 누렇게 뜬 내가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일루 와봐."

"나 불렀어? 왜 왜? 마침 내가 생각난 게 또 있었어. 내가 있잖아."

"아니, 말 좀 그만하고. 그냥 이 부분 좀 봐봐."


‘결혼식장에 갔다가 첫사랑을 마주쳤다’의 일부


전부는 아니고, 마지막 부분을 스크롤해 보여주었다. 절반의 정면돌파였다. 정공법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이 방법이 먹히려나? 표정을 살피니, 입가에 아주 살짝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 같다. '흠. 첫사랑은 결국 대머리였다 이 말이지? 내가 이겼네.' 하는 그 표정. 혼자만의 싸움에서 승자가 된 그에게 트로피라도 쥐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네가 이겼으니 이제 좀 마무리하자고. 종일 급발진하며 부르릉거렸던 네가 제발 전기차처럼 조용해지길. 어서 빨리 하루가 지나가고 내일이 되어 출근하길.


글을 보여주기가 무섭게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기에 온수매트 속으로 쏙 들어가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하루가 길었다. 글 하나에 이렇게 공격 아닌 공격을 받을 일인지 모르겠다. 다시는 사랑에 대한 글 쓰나 봐라.

첫사랑, 정말 지긋지긋하다.




문득 초등학교 6학년 사춘기 초입 시절, 가장 친한 친구에게 선물 받고서 밤잠 못 이루며 읽고 또 읽고 설렘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책이 생각난다. 나중에 영화도 보고 너무 좋아서 눈물짓게 되었던 그 책,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마지막 구절이 오랜만에 떠오른 건 지금 내 심정과 닮아있어서겠지.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도 아마, 네게는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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