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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Apr 23. 2024

시어머니 생신에 또 나만 당했지

당신의 오답노트

#1. 불편한 마음


시어머니 생신이어서 오랜만에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머니께서 뷔페를 가자고 하셔서 그러기로 했다. 오랜만에 골라먹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벌써 신난 초등 아들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시부모님께서 먼저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런데 시동생 부부가 같은 테이블에 앉지 않는다. 옆 테이블에 네 명이 나란히 앉은 모양새다. 졸지에 시부모님 앞은 우리의 자리가 되었고, 시동생 부부는 옆 테이블에 떨어져 둘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동서를 시댁식구들에게서 최대한 떨어뜨려 놓겠다는 시동생의 큰 그림인가? 시동생은 작년에 결혼을 했다. 시동생 부부는 둘만의 시간이 항상 절실하다. 지금이 임신 7개월 정도 되었으니, 아기 태어나기 전에 신혼을 즐기고 싶은 생각이 클 것이다. 나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는 그런 마음이었다. 시부모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불편함 가득이었다. 그래도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선 최선을 다했던 것 같은데. 왜 굳이 옆 테이블에 둘만 따로 타인처럼 있는 건지 모르겠다. 슬금슬금 내 속의 꼰대력과 심술보가 발동을 건다.

"여보, 자리 배치를 좀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다섯 명이 한가족이고, 둘이 따로 온 것 같아. 섞어 앉아야 하지 않을까?"

"내버려둬."

그렇지, 내버려 두는 게 맞지. 나는 무슨 쟤네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형님노릇을 하려고 할까 빠른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아이 낳고 편해지면 친해질 수 있겠지 뭐,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 속의 콩알만 한 배려심이 고개를 든다. 나도 아이를 낳고 공통분모가 생기면서 시댁이 급속도로 편해졌으니까. 물론 시동생 세대는 또 다르고 그들만의 속도가 있을 것이다. 라떼를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2. 재난영화의 서막 (1차전)


뷔페는 자꾸 왔다 갔다 해야 해서 대화가 끊긴다. 그게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불편한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땐 음식을 뜨러 가면 그만이다. 시동생 부부가 떨어져 있는 게 신경이 쓰였는지 내 말이 신경이 쓰였는지 남편이 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불편해하든 말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니,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이 동생에게 말을 건다.

"아기 태어나면 24개월 전에 꼭 여행을 다녀와라. 24개월 전까지는 비행기표가 공짜야. 우리도 23개월에 여행 다녀왔잖아."

초반부터 그 얘기를 꺼내다니. 삐뽀삐뽀 주의보 발령이다. 그 일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시어머니께 상처로 남아있었다.


23개월에 우리는 친정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애초에 시부모님은 아이 돌보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셨었다. 그리고 친정 부모님은 멀리 사셔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맞벌이였고 집에 아이 돌봐주는 이모님이 계셨다. 그런데 이모님을 구하는데도 시행착오가 있어서 공백이 잦았다. 그때마다 친정 부모님께서 열일 마다하고 올라와 도움을 주셨다. 기간으로 따지면 이모님이 계신 기간과 엄마가 돌봐주신 기간이 거의 비슷할 것 같다. 아이 23개월에 유럽 여행을 계획하면서 친정부모님과 함께 가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부모님께 감사함을 보답하고 싶은 마음과 아이를 돌아가면서 돌보면 되니, 육아와 여행을 병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합쳐진 것이었다. 실제로 여행을 가서 우리는 육아조와 여행조로 팀을 나눠 번갈아가면서 여행을 했다. 아이 컨디션 봐서 합쳤다가 흩어졌다를 눈치껏 반복하며 재미나게 놀았다. 모두가 만족한 여행이었다.


친정 부모님과 여행을 하기 전, 남편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미혼이었던 시동생과 여행을 다녀왔었다. 우리가 친정하고만 여행 간다고 하면 서운하실 것 같아, 미리 여행을 다녀오라는 밑그림이었다. 그 사이에 내가 남편 몫까지 일을 했고 남편은 2주간 어머니를 모시고 유럽을 다녀왔다. 어머니도 아들들과 함께한 여행에서 엄청 행복해 하셨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행을 아시고서는 대노하셨다. 여러 가지 화가 날만한 요인이 있었다. 한 달이나, 경민이 데리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만 해도 벌써 세 가지다. 당신도 손주와 함께 길게 여행하고 싶으셨을 거다. 양가를 한 번씩 같이 갈까도 생각 안 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육아에 도움을 안주는 시댁과 함께 가면 아이 챙기랴, 부모님 챙기랴 너무나 극기훈련일 것 같아 나중으로 미뤘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손 갈 일이 적어지자 시부모님과도 일주일씩 몇 번 여행을 함께 갔다. 그런데도 그때의 상처가 덜 아무셨는지, 그 얘기가 나오면 어머니 눈이 세모로 바뀌기 때문에 웬만해선 조심한다. 하지만 남편의 입은 무아지경이요, 나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여보, 아버님이 고기 좀 더 드시고 싶어 하시는데, 좀 떠다 줄래? 나는 경민이 이거 자르는 것 좀 도와주게."

눈치코치 없이 떠드는 남편을 떠밀어 보냈다. 흥분하면 발성도 좋아져서 멀리 앉은 아무개도 다 들을만한 목소리로 광고를 한다. 휴 하고 한숨을 쉬다 눈이 마주친 시어머니께서 한소리 하신다. 이미 어머니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이다.

"쟤는 무슨 여행가라는 얘기부터 하고 있다니? 열심히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나도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이렇게 1차전은 황급히 마무리를 해본다.



#3. 재난영화 2차전, 주인공은 나야 나


남편을 쫓아가 입조심을 시키려고 했는데 안 보인다. 오늘따라 남편의 입이 불안 불안하다. 가끔 이렇게 잘못 터질 때가 있다. 그럴 땐 미리 입조심을 시키는 게 상책인데,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성격이 급해 후다닥 음식을 떠서 벌써 자리로 가버렸나 보다. 별일이야 있겠어, 지친 나는 조금 천천히 이것저것 보다가 음식을 떠서 우리 자리로 향했다. 시동생 부부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웃을듯 말듯한 애매한 표정으로 남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왜 날 저렇게 바라보지? 시선에서 느껴지는 찝찝함. 뭔가 촉이 온다. 고장 난 입이 내게 곤란할지도 모를 무슨 말인가를 했구나. 사뭇 전투적인 발걸음으로 남편에게 다가갔다. 내 시선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가 하는 말.

"그러니깐 걱정 마. 애기는 우리가 봐줄 테니."

잠깐만, 뭐라고? 나의 소리 없는 외침.

"형수님, 형이 그러는데 형수님이 애기 엄청 잘 보신다면서요? 형이 우리 찰떡이 낳으면 봐준다고 했어요."

"어, 걱정 마. 우리 와이프가 애기 엄청 예뻐하고 애 되게 잘 봐. 그렇지?"

형제님들, 오늘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시부모님조차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신다. 나의 황당한 시선을 전혀 못 느끼는 이 사람이 내 남편입니다, 여러분. 나는 졸지에 시동생 부부의 베이비시터가 되어있었다. 그들의 이유 있는 애매한 시선과 웃을듯 말듯한 표정의 의미를 알겠다. 아무도 애를 봐달라고 안 했는데, 애를 자기가 볼 것도 아니면서, 왜 저런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애 낳고 여행 가라고 등 떠밀 때부터 왜 저러나 싶었다. 폭탄이 팡팡 터지는 내 머릿속은 나만 알지. 그러든지 말든지 모두의 시선이 내 입에 쏠려 있다.

"아니 뭐, 가끔 둘이 데이트하고 싶을 때 몇 시간 정도 가볍게 봐줄 수 있죠. 하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새 나왔다. 내가 하도 애를 좋아해서  웃는 줄 알려나.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어느 자리에서나 배경음악처럼 잔잔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극내향의 성향이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시선이 집중이 되면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웃음이 나와버린다. 시아버지께서 쐐기를 박듯 한마디를 더 거드셨다.

"어유 그러냐? 우리는 애 못 봐준다고 얘기했는데. 너는 형수님 잘 둔 줄 알아라."

어질어질하다. 이것이 날 기다린 2차전의 정체였나 보다.


나는 아기를 좋아한다. 하루종일 아기 냄새만 맡고 있어도 힐링이 되는 사람이다. 경민이를 키울 때도 아기가 너무 예뻐서 옆에서 떠나질 못했다. 내 동생이 조카를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조카가 엄마랑 이모를 헷갈린 적도 있어서 자제해야 할 정도였다. 내 아기, 남의 아기 가리지 않고 아기라면 다 예뻤다. 동서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도, 한 번씩 아기를 봐줄까 하는 말을 남편에게 흘렸던 것 같다. 내 입이 잘못했네. 속으로만 생각했어야지. 그런데 남편이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그 말을 꺼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만약에 아기를 보면 주로 내가 보는 건데, 그런 건 내가 말을 꺼낼 일 아닌가. 그전에 시동생 부부가 원하는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먼저 설레발을 칠 일은 아니지 않나. 봐달라고 부탁하면 봐줄 수 있지만, 아직 그들과 편한 사이도 아닌 마당에 왜 나서서 시키지도 않은 저런 말을 하는지. 심지어 동서는 아이 키울 생각으로 일도 그만뒀는데, 과연 우리의 도움을 반길지 안 반길지도 모를 일이다. 참 여러 가지로 나에게만 당황스러운 쓸데없는 말을 뱉은 게 맞다. 내 남편에게 이렇게 태평양 같은 오지랖이 있었다니. 그는 아군인가, 적군인가. 남편 옆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줬다. 소용이 없다. 그날따라 남편에게는 주먹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상하고도 단호한 결의가 있었다.


예전에 남편과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의 은퇴 후 계획에 관해서다. 나는 아기를 좋아하고 돌보는 데 소질이 있으니 아기를 보는 이모님이 되고, 남편은 그 당시 한참 음식하는 재미에 빠져있었으니 음식을 하는 삼촌님이 되어 2인조로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자고. 우리가 힘을 합치면 드림팀이 될 수 있다고. 이 꿈을 벌써 이루려고 하는 건가 보다. 아직 은퇴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4. 복수의 칼날


집에 돌아가는 길, 남편에게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을 해준다. 어차피 화를 내봤자 화낸 기억만 남을 뿐. 알려줘야 다음에 비슷한 일을 막을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내 말을 듣고 반만 이해한 남편이 당장 동생에게 전화해서 애기 못 봐주겠다는 말을 하겠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고!! 그의 뇌는 애를 봐준다/ 못 봐준다의 이분법이다. 맥락, 상황을 이해시키기가 이렇게 힘든 일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또 한 번 깨닫고서 한탄스러울 지경이다. 드라마에선가 보았던 대사를 이빨 꽉 깨물고 내가 할 줄이야.

"여보, 지금 또 전화를 하면 당신 꼴이 얼마나 우스워지겠어요. 누구도 우리한테 애를 봐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이거야말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하는 꼴이잖아. 가만히 있어요.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러자 다음에는 조심하겠다며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게 차라리 낫겠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절이 좋더라니. 제발 절간에 있는 것처럼 고요히 좀 있어보자.


그건 그거고, 잠시 열받은 나의 마음을 달랠 길이 필요하다. 화가 날 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얄밉기만 한 남편에게 복수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내가 얼마나 복수의 화신이었는지 떠올랐다. 대학교 때 남사친으로 관계정리를 이미 마친 친구가 나에게 또 고백을 했던 적이 있다. 자취하던 우리 집 앞이었는데, 옆집에는 선배언니가 살고 있었다. 어떻게 들었는지 문틈 사이로 엿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언니가 우리의 스토리를 듣고 학교에 소문을 낸 것이다. 그 스토리를 알고 있던 건 우리 둘 뿐이었는데. 어쩐지 얘기하는데 씩 웃으며 집에서 나오더라니. 졸지에 그 친구는 나에게 몇 번이나 매달리는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그 얘기를 듣고 너무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언니한테 직접 가서 따질 생각은 못했다. 더 이상한 소문이 퍼질까 두렵고 무서웠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소심하고 찌질한 복수였다. 언니네 집 문에다가 '늙은 여우'라고 연필로 몰래 써놓고 도망을 간 것. 그 글자를 볼 때마다 열받겠지? 지워지긴 하니까 화내기도 애매하겠지? 나라고 예측은 하겠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 뭐라고도 못하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언니는 그 글자를 발견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건 예측범위 밖이었으나 그래도 기분은 왠지 통쾌했다.


여보 있잖아. 나 되게 위험한 사람이야. 내가 지금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거든. 난 당신의 약점을 알지. 당신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말 안 통하는 아기와 함께 있는 것. 두고 봐. 방학에 조카'들'을 불러 모아 우리 집을 어린이집으로 만들어 줄테니. 아침을 아기들 울음소리와 함께 시작해 보는 게 어때? 그리고 난 모든 걸 내버려 두고 룰루랄라 출근을 할 거야.  


상상만으로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상쾌해지는 이 마음. 내가 아무리 남편에게 아직 철이 안 들었다고 구박해 봐야 도찐개찐. 사실은 그나 나나 똑같다. 아직도 20대의 복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보니, 내가 성숙한 사람이 되는 건 다음 생애에나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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