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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May 04. 2024

빨래 개는 기계는 누가 안 만드나

집안일도 글쓰기도 너무너무너무 하기 싫었던 날

짧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루틴이 휘청거린다. 심지어 휴양지에서 먹고 자고 쉬다 왔다. 그런데 집에 올 때의 새벽 비행기 한 번에 수면패턴이 바뀌었다. 심지어 낮잠도 잔다. 내 의지로 자는 게 아니라 끼무룩 잠이 드는 것. 자고 나면 개운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몸은 젖은 솜마냥 무겁고 찌뿌둥.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인지 콧물도 나오고 살짝 멍하다. 여행 후엔 더 힘내서 일상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었는데. 이럴 때 게으름은 따라온다, 가장 싫어하는 일을 꼬리에 물고. 건조기 이모님이 생기고부터는 빨래 널고 개는 것에서 절반의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제일 싫어하는 집안일도 빨래 널고 개는 것에서 빨래 개는 걸로 바뀌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에는 한라산도 백두산도 아닌 빨래산이 떡하니 있다.


분명 여행 가기 전에 집을 번쩍번쩍 치워놓고 빨래도 전부다 개서 제자리에 두었다. 일주일치 빨래가 저렇게나 쌓인다고? 왜? 모르겠다. 모르긴 뭘 몰라. 외면하고 싶어서 외면한 결과지. 처음 두세 타임 빨래를 돌리고서 건조기에서 꺼내, 베란다 트램펄린에 무심히 툭 끄집어 놓았다. 그리고는 지저분해 보이는 게 싫어서 베란다 문을 휙 닫아버렸다. 언젠가부터 트램펄린은 건조기에서 나온 빨래들의 임시 보관소 역할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문 닫아놓고 안 보이니 빨래산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의도적인 외면이다. 그리고는 또 빨래를 돌리려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가, 갈 곳 잃은 빨래들과 눈을 마주쳤다.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개줄게.‘ 처음엔 쌓인 빨래를 보고 죄책감이 들었는데, 몇 번의 시간이 지나다 보니 건조를 마친 뽀송뽀송한 빨래들의 트램펄린으로의 직행이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원래 빨래들의 자리가 거기인 것처럼. 이런 게 바로 깨진 유리창 효과인가?

"엄마, 나 속옷 어디 있어?"

"베란다에서 찾아봐."

"아, 엄마!!! 여기서 어떻게 찾아."

"여보, 나 수건 좀 갖다 줘."

"응. 잠깐만."

두더지처럼 휘리릭 빨래산 속에서 아이 속옷을 찾고, 남편에게 가져다 줄 수건을 찾는다. 일주일 만에 불편함은 생활이 되고, 어느새 난 빨래산 속에서 빨래 찾기의 달인이 되어가는 중. 시간을 잰다면 신기록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하수들 같으니라고, 너희들이 필요한 빨래를 내가 다 찾아주마.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아, 이게 아니지.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아이의 몇 년 후를 생각해봐야 한다. 빨래산이 점점 커져가는 지저분한 집에서 아이가 계속 자란다면? 아이는 다 된 빨래 쌓아두는 걸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빨래는 쌓아두는 것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생길지도 모른다. '오늘까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인데, 내일 할까?' 무서운 생각이 콩나물 대가리처럼 또 고개를 들지만, 도리도리 애써 내쫓는다.   


문닫힌 베란다 너머의 일주일치 빨래 산더미를 마주하러 용감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더 이상 쌓아둘 공간이 없어 산사태가 나기 시작했다. 빨래들은 이미 용암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아 큰맘 먹고 갔는데. 아, 이젠 너무 거대해져서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게다가 오늘 빨아야 하는 것들도 한아름 눈에 들어온다. 벌써 여름이 온 건지, 왜 이렇게 빨래가 빨리 쌓이는지 모르겠다. 나 대신 빨래 개는 기계는 언제쯤 나오려나. 나오면 제일 먼저 사야지. 오늘처럼 따뜻하고 평온한 주말, 남편이랑 아이랑 셋이 오손도손 거실에 앉아 빨래 데이트를 해야겠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빨래 개기 좋은 날 아닌가. 정돈된 집은 우리 모두의 마음의 평화를 보장해 주겠지. 여독을 가장한 춘곤증과 대체 얼마나 붙어있었던 건지, 봄이 다 지나가게 생겼다. 이제라도 잠에서 깬 게으른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쭉 켜본다. 아 맞다, 겨울옷 정리도 아직 안 했잖아!!


나 같은 베짱이에게도 어느새 여름은 한 발짝 성큼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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