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김태환, 2020)
※'보론: 서사문학과 익명주의의 문제'에 관한 내용은 글에 담지 못했습니다.
68년의 선언적 텍스트에서 롤랑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유비되는 ‘저자와 작품’의 종속적 관계를 폐기함으로써 독자들의 자유로운 독서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해석의 최종 심급으로서 작품 위에 군림하는) ‘저자’에의 관심은 개인의 창조성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서구 근대의 특수한 문화적 현상이라는 설명이 이후 널리 유통되었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년에 ‘저자의 귀환’을 모색했다는 사실은 좀더 젊은 시절의 그가 저자를 살해했다는 사실만큼 널리 운위되진 않는 것 같다.)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저자의 죽음’ 테제의 눈에 띄는 모순은 그것이 항상 바르트라는 저자의 서명에 들러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를 미처 귀환시키기 전에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한 바르트 이후로, 저자의 존재론에 관한 대안적 담론들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기존의 논의들이 대부분 서구 근대의 저자 관념과 다른 시대∙문화의 저자 관념을 대비시키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게 김태환의 진단이다. 이는 ‘저자’라는 관념을 특수한 문화적 구성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김태환은 저자 관념을 문어 소통의 보편적인 차원에서 위치시키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야콥슨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빌려 온다. 언어를 경유하는 의사소통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음이다. “저자에 대한 관심은 소통의 근본적 의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김태환은 지적한다. 독자에게서 저자에 대한 관심을 떼어내는 익명주의가 외려 특수한 경우라는 것이다. 익명주의는 저자가 정치적∙윤리적 이유로 박해당할 위험이 있거나 텍스트의 초월적 권위를 세우려는 의도가 있을 때, 또는 저자가 텍스트의 저급함으로부터 자신의 고결한 가치를 보호하려 할 때 채택된다(월터 스콧의 경우).
저자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고대 중국에서 제자백가 사상가들이나 시인들은 드높은 문명을 떨쳐 왔고, 그건 고대 그리스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반대로 앞서 짤막하게 언급한 것처럼 극도의 무관심이 지배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텍스트가 받아들여지는 구체적인 방식에 따른 차이다. 그러나 이것이 저자 관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독자가 특정한 텍스트에 가치를 부여하는 한, 그는 저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만약 해당 텍스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저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각종 전자제품 사용설명서나 팸플릿, 혹은 인터넷 커뮤니티 유머글의 저자가 누구인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단순히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저자 관념이 문어 소통의 보편항임을 인정한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저자와 독자가 대면하는 방식이다. 말을 하고 들을 때, 발화자와 청자의 의사소통은 (글에 비하여) 상당히 투명하게 이뤄진다. 반면 비대면적인 소통인 글은 저자를 투명하게 반영하지 않으며, 당연히 독자 또한 저자를 투명하게 읽어내지 못한다. 글은 저자 및 독자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쓰이고 읽히고 수정된다. 글을 읽는 독자는 언제나 환영적인 저자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역설이 있다.
“하나의 역설은 그 발화자가 ❗사실은 글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거꾸로 글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또 하나의 역설은 그 환영이 글이 단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적극적 관여 속에 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독자에게 타자처럼 나타난다는 점이다.”
독자는 독서를 하는 과정에서 저자를 스스로 구성한다. 실존하는 특정한 인물을 떠올리고 그와 동일시한다(저자 인지). (실제) 저자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가상) 저자를 스스로 구성하려 한다. 요컨대 저자는 “자신이 읽히는 것을 의식하고 어떤 방식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주체”다. 그러니 “저자 읽기는 그 욕망의 층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의 죽음’ 테제의 핵심은 저자의 권위에 지나치게 짓눌리지 말고 독자가 능동적으로 맥락들을 발굴하며 자유롭고 즐거운 독서를 하라는 것이다. 잘만 이용한다면, 저자의 존재는 능동적 독서의 주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카프카의 「판결」 같은 생뚱맞은 단편소설을 읽을 때 텍스트와 작가의 전기적 연관성을 추적하는 것은 풍요로운 독서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이쯤에서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의 가치가 추락함으로써 튀어나온 담론이 아니었는가 하는 김태환의 지적을 곱씹어볼 만하겠다. 실제로 문학자들이 저자를 살해하는 동안 영화계에서는 작가주의 담론이 유행하여 영화를 예술의 반열로 격상시켰고, 위대한 감독들의 이름은 정전의 목록에 기재됐다. 혹자는 이를 후발주자였던 영화비평의 시대착오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핀트를 잘못 짚은 지적 같다.
결국 요점은 ‘텍스트와 사회의 긴장관계’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무엇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거나 하지 않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60년대 바르트의 맥락에서는 ‘저자에 대한 우상숭배’와 ‘작품에 대한 물신숭배’를 경계할 필요가 있었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맥락에서는 저자(감독)와 작품에 아우라를 덧씌울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작품은 텍스트라기보단 차라리 콘텐츠, 즉 일회용 소비재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콘텐츠 소비자들은 작가나 감독의 이름을 더이상 열심히 기억하거나 존경하지 않는데, 이걸 주체적 소비자들의 탄생이라고 마냥 상찬하기에는 어쩐지 조금 찜찜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텍스트의 물신성과 권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를 공허하게 만드는 냉소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냉소주의는 오늘날 인간관계와 소통의 일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