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1』(1981)-브루스 커밍스
종전의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인민의" 정권은 한반도 전역에서 수립됐다. 대부분 항일 영웅들이 이끈 그것은 지도자의 경력에서 정통성을 확보한 토착적 조직이었다. 1945년 8월 40년에 가까운 식민 지배와, 많은 사람이 원했던, 몇 세기에 걸친 불평등한 토지 분배에서 해방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마련됐다. 건준의 인민공화국은 처음이자 가장 깊이 그 과업에 도전했다. "상황은 스스로 울부짖는다.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춰라!"라는 마르크스의 표현과 일치하는 때였다. 그러나 로도스섬에서 뛰어오른 한국인들은 허공에서 추락했고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
여운형은 정치가였고, 따라서 엄격히 정의하면 기회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통찰력 있는 정치가 격렬한 감정적 비난에 매우 자주 무너지던 1940년대 후반 한국에서 그런 기회주의는 유용했다고 생각된다. 여운형은 넓은 지지 기반을 가진 통일된 한국 정부를 바랐고 그런 목표를 이루려면 타협이 필요하며 통일의 현실적 필요는 사소한 개인적 감정을 뛰어넘는다고 판단했다. 해방 뒤 그는 좌우합작을 지치지 않고 주장했으며 그런 활동 때문에 1945년 8월 습격당했고 1946년 10월에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뿐만 아니라 1947년 3월에는 자택이 부분적으로 폭파됐고 1947년 7월 19일 끝내 저격당해 세상을 떠났다. 요컨대 여운형은 다양한 환경에서 오래도록 활동한 인물이었지만 이분법적 논리가 지배한 해방 정국에서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는 경무부를 "일제에 훈련받은 경찰과 민족 반역자, 북한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쫓겨난 부패한 경찰의 피난처"라고 불렀다. (…) 최능진은 "매일 아무 증거도 없이 개인적 감정 때문에 사람들이 체포된다. 어떤 이가 저 사람은 좋지 않다고 말하면 그는 투옥돼 구타당한다"고 주장했다. 최능진은 "경무부는 썩었고 국민의 적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인 80퍼센트가 공산주의자로 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최능진은 이런 의견을 진술한 뒤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