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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Oct 19. 2023

(한국) 현대사의 원점을 재구성하기

『한국전쟁의 기원 1』(1981)-브루스 커밍스

(한국) 현대사의 원점을 재구성하기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1016500230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전면적으로 기습했다. 명분을 득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절멸을 예고하며 이를 갈고 있다. 스무 달 전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그랬듯이 전쟁의 참상은 SNS를 통하여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으며, SNS는 확인하기 어려운 프로파간다가 난무하는 격전지가 되었다. 빗발치는 피드의 홍수를 정신없이 헤엄치고 있노라면 실시간으로 시비를 가리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오늘날 전쟁은 현장을 떠나는 즉시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고 유통된다. 수전 손택이 이미 지적한바 현실보다 현실적인 끔찍한 이미지는 최초의 충격에 이어 금세 무뎌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쁜 결과는, 끔찍한 이미지로 인해 촉발된 극렬한 혐오가 전쟁 이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감추고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제시된 이미지는 역으로 아군의 호전성과 복수심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우리에겐 이미지와의 거리가 필요하다.



사실 왜곡과 적대의 정치를 매체의 탓으로만 돌리는 건 현명한 진단은 아닐 테지만, 홑겹의 이미지가 아닌 겹겹이 비가시화된 전쟁, 클라우제비츠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의 계속으로서의 전쟁’을 이해하려면 SNS를 잠시 꺼두고 공들여 쓰인 문자매체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일 테다. 시의적절하게 완역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이 지점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두 가지 시사점을 준다. 하나는 이 책이 그 자체로 (1) 한국 현대사의 난맥상을 정리하는 데에 유용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 한국전쟁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두 전쟁에 한참 앞서) 미국 주도 체제와 반反미국적 대안체제가 전면 충돌한 최초의 현대사적 사건으로서 오늘날 세계질서의 어느 기원이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지금 커밍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정치의 정통성을 놓고 거대양당이 벌이는 역사논쟁에서부터 제1세계 헤게모니의 추락과 이를 둘러싼 세계사의 향방까지를 검토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1권만 읽었다. 당분간 2권은 미뤄두려고 한다. 1권만 읽어도 2권의 전개가 예측되는 만큼, 일단은 이 정도면 족한 듯싶다.)


물론 SNS 이용자들이 필터버블에 갇혀 있는 것처럼 커밍스도 당파성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원인을 주로 자기 나라(미국)의 편향되고 불의했던 한국 정책에서 찾는 것은 그가 60년대 베트남전의 참화를 바라보며 20대 청년기를 보낸 케네디적 진보주의자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연구는 한국전쟁에서 소련과 북한의 책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 또한 커밍스가 서술하는 전후 미국 대외정책의 두 축 중 하나인—그리고 트루먼과 미 군정의 일국독점주의에 의해 결과적으로 밀려나고 만—루스벨트식 국제협력주의는 인물 개인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서술된 감이 있어 보충을 요한다(아마 필자가 2권을 읽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전쟁의 기원』이 1981년에 초판된 책이라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커밍스의 입장은 이후 공개된 문헌들을 검토한 연구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반박당하기도 했다(대표적으로는 박명림이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유의사항에도 불구하고) 커밍스는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당파적이지만, 어떤 당파성은 폭력적이고 피상적인 반면 어떤 당파성은 견실하고 사상적이다. 우리가 붙잡고 씨름할 가치가 있는 것은 후자뿐이다. 커밍스는 분명히 후자다. 이른바 수정주의의 포문을 연 그의 접근방식은 한국전쟁의 원인을 남침 또는 북침에서만 찾으려 하는 편협한 전통주의와 결별하고 역사를 보는 통시적∙공시적 시야를 두루 넓혀준다. 일제강점기의 왜곡된 토지 소유 관계와 사회구조로 인하여 전통적 지배계급의 정당성이 실추되었음에도 소비에트 노이로제를 앓던 미 군정의 정치적 오판으로 남한의 정치 지형이 왜곡되었다는 커밍스의 지적은 상당히 타당해 보인다. 자료가 태부족한 지방 인민위원회의 활동까지를 추적하며 논리를 쌓아가는 커밍스의 사유를 따라가는 것 또한 확실히 흥미로운 일이다.


방대한 문헌들을 정리하고 연결하는 커밍스의 지적 성실함이 아니었다면 해방기 한국인들의 정신적∙물질적∙정치적 지도를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은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이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커밍스의 설명은 당연하지만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준다. 그에 따르면 해방 정국의 한국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헌신도 아니고, 스탈린 또는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한국 민족과 독특한 전통을 보존해야 하며 독특한 한국에는 독특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민족주의자ㆍ보수주의자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한국적 공산주의’였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강력하고 중앙화한 농업 관료체제의 조직적인 수탈에 의해 왜곡된 자본주의 경험에서 형성된 사실상 식민주의와의 동의어였다는 것이다(당대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를 곧잘 ‘한국의 자본주의 단계’라며 경멸조로 일컬었다고 한다). 기업가 정신이 성숙하지 않은 채로 봉건적 지주 기득권에 의해 형성된 자본주의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정치∙경제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하다.


홍범도 장군 흉상


가슴 아픈 우리의 현대사는 (홍범도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한다느니 하는) 정치논쟁에 아직까지도 동원되고 있다. 커밍스의 저작은 오늘날에 와서 과거를 함부로 재단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이 시대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역사란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기 마련이지만, 현재는 과거를 과거대로 충실히 재구성한 다음에야 도출할 수 있다. 마르크스를 인용한 1권 말미의 다음 구절은 이 책의 작업을 인상 깊게 요약해 준다.


종전의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 "인민의" 정권은 한반도 전역에서 수립됐다. 대부분 항일 영웅들이 이끈 그것은 지도자의 경력에서 정통성을 확보한 토착적 조직이었다. 1945년 8월 40년에 가까운 식민 지배와, 많은 사람이 원했던, 몇 세기에 걸친 불평등한 토지 분배에서 해방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마련됐다. 건준의 인민공화국은 처음이자 가장 깊이 그 과업에 도전했다. "상황은 스스로 울부짖는다.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춰라!"라는 마르크스의 표현과 일치하는 때였다. 그러나 로도스섬에서 뛰어오른 한국인들은 허공에서 추락했고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




+ 1. 오늘날에는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김구와 임시정부 출신 민족주의자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당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던 인물은 여운형 선생이라는 점도 새삼스럽지 않은가. 고작 사반세기 만에 우리의 역사인식은 조상들의 사상과 동떨어져 변질되었고, 우리는 그 왜곡된 렌즈를 통해 우리의 뿌리를 본다. 이건 어쩔 수 없을뿐더러 당연한 일일 테지만, 우리는 그 뿌리를 캐내고 현재와의 관계를 읽어내려는 작업을 게을리할 수 없다. 여운형에 대한 커밍스의 긍정적인 평가는, 지금보다 나은 다른 한국을 상상케 한다.

원구단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여운형 선생
여운형은 정치가였고, 따라서 엄격히 정의하면 기회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통찰력 있는 정치가 격렬한 감정적 비난에 매우 자주 무너지던 1940년대 후반 한국에서 그런 기회주의는 유용했다고 생각된다. 여운형은 넓은 지지 기반을 가진 통일된 한국 정부를 바랐고 그런 목표를 이루려면 타협이 필요하며 통일의 현실적 필요는 사소한 개인적 감정을 뛰어넘는다고 판단했다. 해방 뒤 그는 좌우합작을 지치지 않고 주장했으며 그런 활동 때문에 1945년 8월 습격당했고 1946년 10월에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뿐만 아니라 1947년 3월에는 자택이 부분적으로 폭파됐고 1947년 7월 19일 끝내 저격당해 세상을 떠났다. 요컨대 여운형은 다양한 환경에서 오래도록 활동한 인물이었지만 이분법적 논리가 지배한 해방 정국에서 끝내 목숨을 잃었다.



+ 2. 미 군정에 의해 초기에 구성된 한국경찰은 일제 치하에서 복무한 친일경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지주 기득권 세력과 결탁했는데, 당시 한국의 권력과 사회구조가 얼마나 뒤틀려 있었는지는 소수의 애국경찰인 최능진—그는 온건 반공주의자,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의 고발이 통렬하게 증언하고 있다. (최능진 선생은 이후 친일 헌병 출신인 김창룡에 의해 여순사건의 배후 세력이라는 음해를 당했고, 1951년 이적죄로 총살당한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2015년에야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복권시켰다.)

최능진 선생
그는 경무부를 "일제에 훈련받은 경찰과 민족 반역자, 북한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쫓겨난 부패한 경찰의 피난처"라고 불렀다. (…) 최능진은 "매일 아무 증거도 없이 개인적 감정 때문에 사람들이 체포된다. 어떤 이가 저 사람은 좋지 않다고 말하면 그는 투옥돼 구타당한다"고 주장했다. 최능진은 "경무부는 썩었고 국민의 적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인 80퍼센트가 공산주의자로 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최능진은 이런 의견을 진술한 뒤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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