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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Nov 04. 2023

한 작가를 키우는 데에 필요한 것들(희망편)

『자유를 찾은 혀―어느 청춘의 이야기』(1977, 엘리아스 카네티)


한 작가를 키우는 데에 필요한 것들(희망편)


Andrea Ventura의 엘리아스 카네티 초상화(좌)


자전적 소설의 묘미는 무심결에—또는 짐짓 의도적으로—분열하거나 겹쳐지는 저자와 화자의 상像을 파악하는 데에 있다. 저자의 생애사적 사건과 그에 대한 개인적인 반응이 화자의 목소리에 실려 변주될 때의 야릇한 긴장감은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한편 소설적 덮개를 뒤집어쓰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자전적 회고록, 다시 말해 자서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저자/화자의 미묘한 거리감과 목소리의 떨림은 지워지고, 오직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피상적이고 영웅적인 자아상만 남는 것이다. 음, 어쩌면 이건 다른 방식으로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를 의심하게 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독자는 이런 글을 읽으면 대체로 거북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종류의 글에 감동받는 독자들도 더러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심지어 그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그 사실조차도 거북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자기계발서나 정치인의 회고록에 반감을 느끼는 독자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부류이리라. 시중에서 인기를 끄는 책들의 상당수는 자서전적이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누구누구의 자서전으로 홍보되지 않았다 한들, 우리는 누구나 이미 자서전이 대체로 어떠한 글인지 알고 있다.)






아마 엘리아스 카네티도 필자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 원래 그는 자서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다. 그에 따르면 자서전 쓰기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1971년의 어느 날, 그러니까 그가 60대 중반을 지나고 있던 시기에, 그는 자신의 노트에 “내 삶을 기록하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낀다”는 메모를 남긴다. 그해는 그가 아끼던 막냇동생인 조르주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그의 첫 번째 자서전인 『자유를 찾은 혀—어느 청춘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6년 뒤인 1977년에 출간되는데, 한 해 전의 노트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젊은 날의 이야기가 훗날의 삶에서 중요해진 것의 목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 이야기에 낭비, 실패, 탕진도 포함해야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원래 알고 있는 것만 발견한다면 그건 사기꾼이다. ... 내 기억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이 내게는 정말로 의미 있는 것 같다. 그 모두가 말이다. 내가 언급하지 않고 몇몇을 뒤에 남겨 두는 방식은 나를 괴롭힌다."


인용된 메모가 보여주듯이 『자유를』은 우리가 거북해하는 종류의, 비대한 자아를 뽐내고 부풀리며 곧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인을 위무하는 그런 싸구려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니 필자와 같은 부류의 독자들이더라도 안심하고 읽어도 되겠다. 이 책은 어느 작가를 만든 인물과 사건들에 관한 더없이 충실한 기록이다(열여섯 살 때까지의 일화만으로 500페이지를 훌쩍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작가 중에서도 정말로 드물 것이다). 또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확인받기 위한 요식 행위가 아니라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을 되짚어가며 한 사람의 총체적인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심도 깊은 탐구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복잡한 애착 관계를 맺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자서전이라기보단 차라리 역사 속의 무명씨로 사라질 뻔한 어머니에게 바치는 ‘마틸데 전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연히 무명 화가를 알게 된 어머니가 걸작의 모델이 되어 불멸을 획득하기를 염원하는 4부의 끄트머리를 읽고 나면, 카네티가 화가를 대리하여 어머니의 소원을 정당한 방식으로 이뤄주려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하게 된다. 카네티와 그리스 위인들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어머니가 “그런 남자들의 어머니들이 전혀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걸 부당하게 여겼다”는 대목까지 읽고 나면 더더욱.


물론 그렇게 단언할 수만도 없는 것은 책의 초반에 돋보이는 아버지의 친근한 존재감을 비롯하여 그 밖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예닐곱 살까지 살았던 루세에서의 일화들을 다루는 1부는 특히 흥미로운 도입부다. 유년기의 풍경들을 이처럼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달리 또 있을까?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주었던, 그럼으로써 “그 뒤로 펼쳐질 인생 전체를 결정지었”던 『아라비안나이트』만큼이나 그의 어린 시절 이야깃거리는 풍요롭다. 유모의 애인에게 혀를 잘라버리겠다는 공갈을 듣던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최초로 맞닥뜨린 타인의 죽음과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꼬마아이가 느낀 살의, 이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질투심, 당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종말론, 불 구경과 사람 구경, 언어에 대한 감각들,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불편한 집안 문제까지를 카네티는 꼼꼼히 기록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결코 추적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세분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무언가가 그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안다. 카네티는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고백한다. 이 책은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우리가 지나쳐온 것들의 조각 모음에 불과함을 일깨워준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단연 어머니다. 아버지를 여의는 2부부터는 그의 어머니가 카네티의 서술 속에서 점점 생생한 모습을 드러낸다. 카네티는 어머니에게 찬탄하면서도 모자간의 미묘한 긴장 관계와 서로의 결함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상당한 문학적 소양을 지닌 데다가 가족 구성원들의 상당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그녀의 가문에 대한 앞뒤가 안 맞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히스테릭한 면모도 있어서 자주 병을 앓고, 아들에게 높은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여자다. 그녀는 “작고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경시했다”고 아들 카네티는 서술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남편을 옭아매는 시아버지와 맞부딪쳐 독립을 이뤄내기도 하는 강단을 지녔고, 반전反戰과 종교의 허례허식에 관한 진보적인 신념을 지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명문가 출신의 유복했던 여성임에도 세 아이와의 생활을 손수 꾸려나갈 줄도 아는 강인한 여장부였다. 특히 카네티는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의 그가 이해타산적인 고려 없이 스스로의 관심사에 따라 지적 태도를 단련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냉혹한 예리함과 관용”을 모두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가 헤로도토스적인 지적 개방성을 갖고 세계를 바라보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주효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희생시키지 않은 메데이아 같은 여자다.


“그토록 많은 것과 대치되는 것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 겉으로는 모순되는 모든 것이 동시에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 그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인간이라는 대자연이 지닌 진정한 영예로움을 언급하고 또 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어머니의 일장연설은 『자유를』의 결말이자 백미이기도 하다. 5부에서 내내 사변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를 길러 나가던 청소년 카네티에게 어머니는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며 뼈 아픈 일침을 날린다. 이 대목은 새롭진 않지만 장구한 인생사의 교훈으로서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네가 정말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삶과 맞붙어 고군분투해 본 자가 인간이야. … 떠버리가 인간은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동안에는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어. 네가 정말로 무언가를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될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드는 거야. 고상하게 들리거든. 하지만 오직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에만 달려 있어.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해. 또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거야. 너는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이 매우 만족스럽거든. 만족하는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만족하는 인간은 게으르지. 만족하는 인간은 무언가를 하려고 시작하기도 전에 은퇴했어.”
“책에서 읽은 것처럼 말이지, 그렇지? 너는 그게 어떤지 알기 위해서 무언가를 읽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충분하지 않아. 현실은 별개의 문제야. 현실은 모든 것이야. 현실을 피하는 사람은 살 자격이 없어."


자식에게 책을 읽힐 줄도 알고 뺏어서 세상에 내보낼 줄도 아는 이런 어머니를 둔 인간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카네티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렇게 쓴다. “낙원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태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으로 이런 시대를, 이런 여건들을 갖춘 채 세상살이를 겪을 수 있었던 작가는 또 얼마나 운이 좋은가? 작가란 모름지기 어느 정도 자아가 뒤틀려 있기 마련인데, 카네티는 심지 굳은 부모의 영향과 너무나도 풍요로운 정신적 자극들로 인해 비교적 꼬인 데 없이 훌륭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듯싶다. 놀랍게도 그는 무려 십대 후반에까지 남녀의 성적 결합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에로틱한 것들에 대한 어머니의 엄격한 금지조차도 자신에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런 걸 보면 여러모로 참 운도 좋았던 사람이란 생각에 조금 부러워진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슬로건이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빈말이 아님을―그리고 작가의 경우에는 아마도 그보다 더 까다로운 요소들이 아다리 맞게 결합되어야 하리라는 것을―『자유를』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아, 역시나 조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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