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nui Dec 08. 2023

왜 장태완이 아니라 이'태'신인가?

〈서울의 봄〉(2023)과 한국현대사영화들에 관하여


왜 장태완이 아니라 이’태’신인가?


<서울의 봄>에 관한 반응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Inglourious Basterds>를 언급하며 ‘대체역사물로서의 한국현대사영화’를 요구하는 코멘트들이다. 타란티노가 기관단총으로 히틀러의 얼굴을 완전히 짓뭉개버리듯 전두’광’을 벌집으로 만들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한국영화에서 자신들의 소망이 실현되기는 아직 이르다는 점을 재빨리 수긍하는데, 임상수의 <그때 그사람들>이 법적 시비에 휘말렸듯 이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역사적으로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현재진행형임을 인정한다는 투다.


양당의 대선후보들조차 전두환에 대한 평가를 미적거리고 당시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오늘날 한국에서 이는 분명 실제하는 이슈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에 관하여 논하는 것은 그다지 흥미로운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한국현대사영화 특유의 비장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현대사를 다루는 영화들은 도대체가 후까시를 안 잡고서는 못 만드냐는 말이다(허문영이 ‘중세의 성화가 아닌 근대의 풍속화’로 비유한 <그때 그사람들>만이 여기에서 자유롭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한국에서 <바스터즈> 같은 영화가 나오지 못하는 진짜 이유일 수 있다.



타란티노는 젠체하지 않는다. 그는 히틀러라는 절대악을 처단하는 이들을 성인聖人처럼 떠받들지 않는다. 그들은 나치의 악행에 똑같이 잔학 행위로 맞서는 거친 ‘개자식들’이다. (일라이 로스가 충직한 나치 부사관의 골통을 빠따로 때려부술 때, 또는 브래드 피트가 칼로 스와스티카를 새기는 한스 란다의 마지막 시점 쇼트에서 몸서리친 것이 나뿐만은 아니리라.) 의도적으로 어긋난 제목의 철자법—Inglorious Bastards가 아니라 Inglourious Basterds인—과 조응하는 브래드 피트의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상기해 보라. 타란티노의 히틀러 살해는 픽션적 카타르시스를 위한 구실일 뿐이다. 물론 히틀러와 한스 란다에 대한 징벌이 윤리적 판단을 전혀 배제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타란티노에게 이는 쾌감의 알리바이로써만 필요하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뜨거우면서 시원하다. 관객들의 스트레스는 유머러스하게 해소된다.


반면 <서울의 봄>은 어떠한가. 당당한 정우성과 마약상을 연상케 하는 야비한 황정민 무리가 복도를 마주 지나가는 장면과 이어지는 대화들은 이 영화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민족의 성웅인 이순신 장군에서 빌려온 것임이 분명한 ‘이태신’이라는 네이밍도 그렇다. 한국 관객들은 장태완 장군이 어떤 사람인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아마 실제의 장장군은 정우성보단 <제5공화국>의 김기현을 닮았을 테지만, 김성수에게는 이태신이라는 신화적 기호와 정우성의 잘생긴 얼굴이 필요할 뿐이다.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할 운명이었듯이 이태신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대체역사를 쓰고자 하는 소망을 좌절시키는 것은 끈질기게 잔존해온 한국정치의 악당들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 시민들을 자처하는 관객과 그들을 대변한다고 하는 창작자들이 공히 공유하는 모종의 잠재의식 아닐까?


http://m.cine21.com/news/view/?mag_id=23779


그러니까 허문영이 이미 이십 년 전에 분석하였던 한국상업영화의 소년성은 여전히 극복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할리우드영화들이 미국적 질서를 수호하는 공동체의 영웅을 상상하는 것과 달리, 한국상업영화는 공동체에서 쫓겨난, 하지만 그렇기에 도덕적 우위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소년을 요구한다. 한국영화의 소년들은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와도 다르다. 미국영화의 안티-히어로들은 공동체의 신화에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질서를 의심케 한다. 우리의 소년들은? 공동체의 신화를 대체하고 독점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망상인데, 그들은 기득권이 아닐 때에만 정의의 담지자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년들은 피터팬으로 남아야 한다. 그들은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온몸으로 감당할 준비도 되지 않았고, 킬킬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여유도 가지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서울의 봄>을 비롯한 일련의 한국현대사영화들은 정치적이라기보단 차라리 비정치적인 영화가 맞을 것이다.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려는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이런 영화들은 아무런 정치적인 변화도 일으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유운성의 지적마따나 이건 MCU에 이은 ‘5공 유니버스’일 뿐이다. 소년은 관객들이 지니고 있는 자기-이미지를 반영한다. 한국 관객들은 자신들의 민낯을 우수에 젖은 정우성, 또는 순수한 정해인의 얼굴로 모에화하여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고구마’를 기피하고 ‘사이다’에 집착하는 작금의 대중문화에서—나는 지금 <범죄도시>를 떠올리고 있다—<서울의 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들 말마따나 ‘영화를 잘 만들면 사람들이 보러 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분노하고 답답함을 느낀다는 사실조차도 공동체의 신화를 견고히 유지하고 자아정체성을 기분 좋게 쌓아올리는 데 기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태신과 강대령, 특전사령관과 정해인이 맺는 짠내나는 브라더십을 신파적으로 강조하기까지 하는 것은 우습게 느껴지는데, 브라더십이야말로 하나회의 근본강령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순신 장군의 성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점도 실소를 자아내는 포인트다.)



결국 <서울의 봄>이 유발하는 분노는 픽션이라는 매체에서 해소되거나 승화되지 못하고, 현실의 악인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범람한다. 그들은 ‘인간’조차 아니며,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닌 인간다움의 문제로 환원된다(이동진이나 김태훈이 십 년 전에 <변호인>을 두고 했던 코멘트와 이에 대한 김병규의 적절한 비판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한 주장 자체를 기각할 생각은 없다. 응분의 죗값을 치르지 아니한 역사의 죄인들을 현재의 스크린에서나마 처벌함으로써 오욕으로 점철된 공동체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하는 소망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발현되는 양상이다. 한국의 유사-역사 또는 유사-정치영화들은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우리 편을 성역화하는 한국사회의 낡고도 새삼스러운 징후를 매번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영화의 맨 앞에서는 실제가 아니라며 둘러대고 맨 끝에 가서는 기록영상이나 음성을 삽입하여 실화임을 강조하는 촌극을 벌이는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마찬가지로 기록영상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그때 그사람들>은 남다른 선택을 하는데, 임상수는 오프닝시퀀스에서 부마항쟁의 열기를 보여주더니 엔딩시퀀스에서는 박정희 서거 이후 눈물 흘리는 국민들의 침울함과 국장 영상을 보여준다. 다시 한 번 허문영의 말마따나, 이 영화는 '그때(그리고 지금) 당신들은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반대로 <서울의 봄>에서 '시민'을 호명하는 순간은 정우성이 무슨 감격적인 아이디어라도 떠올린 마냥 시민들의 통행을 막아 한강 다리를 틀어막겠다는 장면에 국한된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강 위에서 어리둥절하던 '시민'들을 끌어들이면서 김성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못 느꼈던 걸까? 우리는 언제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오도 가도 못하는 순진한 시민으로 머물러야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