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nui Nov 05. 2023

담배와 인동초의 이중의식: 살인은 때때로 꿀 같은

〈이중 배상〉(1944) - 빌리 와일더

담배와 인동초의 이중 의식: 살인은 때때로 꿀 같은


결말을 대강 알면서도 빨려 들어가는 게 나쁜 짓의 속성이다. 정말로 끝장을 볼 때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스포일러를 당하고 보는 영화처럼.


빌리 와일더는 우리를 월터 네프의 공범으로 만든다. 돈과 여자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의 것이고, 월터는 단지 여자의 발찌에 걸려 넘어져 목발을 짚었을 뿐이다. 우리는 탐정이 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탐정을 따돌리고 싶어도 한다. 그러다 다리를 절게 되고 어깨에 총을 맞을지라도. 때로는 진실보다 비밀이 더 가치 있는 법이다.


뭔가 잘못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월터가 자신의 발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이미 주어진 것과 같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할 때, 우리는 옆에서 같이 덜덜 떨며 스스로의 숨소리조차 듣지 못다.



다시 한 번, 잘 만든 필름누아르는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 월터를 전혀 의심하지 않던 키즈가 자신만만한 추리를 마친 다음 월터를 슬쩍 올려다볼 때, 내러티브상으로는 월터를 추궁하는 것이 아닌 그 잠깐의 지나치는 눈빛에조차 관객은 맘 졸이게 된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결국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진다.


비밀은 어쩌면 처음부터 누설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낙원은 없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결코 그런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는. 영화라는 환상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특권은 범인들과 함께 올라탔던 열차에서 중도에 내릴 수 있는 탈출 권한뿐이다.



그리하여, 향수 냄새와 인동초 향기가 시가와 연초 냄새에 뒤섞여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속도를 줄이는 열차에서 몰래 뛰어내려 추적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도망하고선 담배를 한 개비 꼬나물고 씁쓸한 환상을 곱씹는 것이다. 꼬인 인생의 희망과 한때 꿈이었던 것을.


그럴 때엔 그런 씁쓸함조차 꽤나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어찌 됐건 그건 타인의 환멸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럴지도.


누아르는 아무렴 이런 맛에 보는 거 아닌가. 아, 담배 마렵다.



...쓰고 보니 어쩐지 좀 피츠제럴드적인걸.


그러고 보면 영화는 역시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진동하는 매체다. 진짜 보험사기꾼이 될 순 없잖아?


아니지. 영화 속 월터 네프는 욕망과 환상에 충실하고자 실제로 범죄를 행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배신당했고, 또는 처음부터 속았고, 여자를 죽였고, 마지막엔 변명하지 않았다.


방금 글을 쓰는 동안에 그건 그것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터 네프 케이스에서 낭만과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이 붙을까 봐 겁이 나서 성냥을 안 들고 다닌다는 의심병 환자, 이 영화의 탐정 역할인 보험조사원 키즈와 달리 월터 네프는 생각하고 의심하기를 그만두고 나름대로 자기의 현실을 산 거다. 그러니까 그는 내근직으로 일해 보라는 키즈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음, 그럴듯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근직이 편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영화를 보는 수밖에. 이런 영화를 보고 나선 그냥 이런 다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은 보험금을 토해 내더라도 내일은 두 배 세 배 네 배 현실을 등쳐 먹으리라!


인동초는 겨울을 견뎌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언젠가 현실의 경로를 벗어나거나 그 도정 위에 놓인 발찌를 좇기를 희망하면서. 늦가을의 토요일 새벽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