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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Oct 28. 2023

역사力士/歷史의 실종

〈킬링〉(1956, 스탠리 큐브릭)



역사力士/歷史의 실종




완벽할 줄만 알았던 계획은 진척돼 가면서 예상된 경로를 빗겨가고, 직선적으로 보이던 욕망은 현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좌초된다. 미완성의 그림을 구상하며 끼워 맞추던 퍼즐은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하이스트무비의 알파와 오메가임이 분명한 <킬링>이 통제광으로 알려진 큐브릭의 20대 시절 작품이라는 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각본의 치밀함과 필름누아르의 냉혹함만큼이나 경쾌한 재즈풍 사운드트랙과 배우들의 활력이 느껴지는 장면들 또한 매력적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오마주한 것임이 틀림없는 범행 씬은 앞뒤가 딱 떨어지는 장르적 쾌감의 진수를 보여주는 반면, <저수지의 개들>을 떠올리게 하는 총격 씬은 관객을 시각적으로 아예 납득시키려 들지조차 않는다. 숏의 논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는 듯한 비약이 도리어 관객을 장르와 현실의 너머에까지 데리고 간다.


이 밖에도 쟈니의 인자한 유사-부친처럼 보이던 엉거가 둘만의 도피를 제안하는 장면은 동성애·근친상간적인 불온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고, 말 저격수가 흑인 주차장 직원과 주고받는 대화는 인종적인 갈등까지를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주역들은 <오션스>나 <도둑들>과는 달리 ‘선수’가 아니다. 범죄에 가담하는 이들은 쟈니의 말을 빌리면 “보통 말하는 범죄자”가 아니며, “다들 직업이 있는 사람들 … 겉보기에 평범하고 점잖은 사람들”이다. 그저 “각자 조금씩 문제를 겪고 있고 조금씩 도둑질을 할 뿐”이다. (물론 이들을 총괄하는 쟈니는 결코 평범하거나 점잖아 뵈진 않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비겁한 셰리와 그의 젊은 정부도, 조금은 비범해 보이는 쟈니도, 모두 맥 빠지게 실패하고 마는 영화의 끝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이는 경마장에서 소동을 피운 레슬러 모리스뿐일 터인데, 그가 예술가와 마피아의 친연성을 언급하며 쟈니에게 건넨 충고—”남들과 비슷하게 살아야 돼.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개성이라는 건 괴물 같아. 태어나자마자 목을 졸라 죽여야 해.”—는 개인의 개성을 억누르고 평준화하려 드는 현대사회의 경향을 젊은 예술가였던 큐브릭이 에둘러 자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할 수 없는 역량을 지닌 믿음직한 친구이면서도 체스장이나 전전하며 소소하게 범죄에 가담하는 레슬러 모리스는, 타고난 장사이면서도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기껏해야 야밤중에 동대문의 돌덩이나 부질없이 옮기는 김승옥의 「역사(力士)」를 떠올리게끔 한다. 비범함을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거나 야심 없이 낭비하는 이만이 근근이 살아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현대사회며, 은행을 터는 무장강도는 영화관에서나 볼 수 있는 구시대의 전설로 남는다. 예술가의 처지도 은행강도와 다르지 않다. 요구되는 것은 작품이 아닌 공산품이다.



어쩌면 모리스의 비범함은 시대와 맞춰 개성을 죽이고서도 태연하게 살아가는 적응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큐브릭의 적응은 개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계기가 마련될 때까지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사라지는 것이다.


약간의 돈과 신뢰를 대가로 잠깐 개성을 발휘하기 전에, 그는 체스장 주인인 친구에게 이상한 부탁을 한다. 자신이 정해진 시간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해 달라는 것이다. 큐브릭은 앞이나 뒤에서 이 장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태양을 바라보다 눈이 멀었다는 시베리아 양치기의 우화는 관객에게 그의 정체(개성)을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는 웃음기 띤 겁박처럼 들린다. 그는 아무런 귀띔 없이 영화 밖으로 사라진다.


레슬러는 큐브릭의 역할을 대리하는 것일까? 혹시 그가 이 영화의 서사상 내레이터인 것은 아닐까? <킬링>의 편집과 내레이션의 삽입이 알려진 대로 제작사가 개입한 흔적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어디까지 큐브릭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큐브릭과 레슬러는 은근슬쩍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장르의 시초이자 전형이 된 큐브릭의 <킬링>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공산품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말하자면 <킬링>은 엘리트주의적이면서 비-엘리트주의적인 영화다. 허무한 결론이지만 우리는 그 허무를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범죄자-영웅의 성공을 염원하는 이중적인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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