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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Oct 26. 2023

왜가리를 돌아다보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미야자키 하야오, 2023)

왜가리를 돌아다보


23년 8월 9일의 왜가리


얕고 탁한 물이 흐르는 이끼가 잔뜩 낀 실개천 근처에서 꼿꼿이 선 채로 굳은 왜가리를 한 마리 본 적이 있다. 큰 입을 벌려 나를 집어삼키려고 날아드는 기괴한 괴물이 머릿속에서 연상됐다. 비일상적인 망상의 두려움에 압도된 채 잠깐 동안 서서 왜가리와 초점 없는 눈싸움을 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쪼이다시피 다리를 건넜다. 뒤를 힐끔힐끔 돌아다보며. 고기가 잡히기나 할는지 모를 더러운 물가를 지나쳐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왜가리는 내내 가만히 있었고, 나는 오늘까지도 그날의 사소한 사건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왜가리는 정말 어떤 인간적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은 눈을 뜨고 있는 새다. 조류에 대한 두려움은 그 비인간적인 눈알에서 기인하는 모종의 코스믹호러적인 공포다. 영화를 보고 나니 아마 어린 날의 미야자키 하야오도 왜가리를 무서워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드는데, 그런 그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말년의 영화에 왜가리-인간을 등장시켰다는 사실이 묘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어살>의 왜가리-인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왜가리는 왜가리 탈을 뒤집어쓴 요상한 인간이거나 그냥 왜가리 탈인데,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지만 왜가리-인간 자기 자신만큼은 진실을 말하고 있노라고, 왜가리-인간은 역설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는 여기서 스스로의 구멍을 노출한다(그는 왜가리인가 인간인가? 거짓말쟁이인가 믿을 수 있는 이인가? 친구인가 적인가?). 그리고 그 왜가리-인간의 안내와 유혹에 의해 야기된 마히토(참-인간)의 탑 방문은, 기하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하던 거짓-목가적 세계의 합리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세계의 주인인 큰할아버지는 똑똑했으나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미쳐버린 간서치이고, 그가 주조해낸 유토피아-탑은 마침내 붕괴하여 현실로 용해되고 만다.    



세상엔 온갖 징그러운 것들이 즐비하다. 떄로 그러한 징그러움은 우리 자신의 편협함 때문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키치'를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로 간주한다. 이건 우리 모두의 존재 조건인데, 모든 인간은 자기 세계관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을 차라리 없는 셈 치고 외면한다는 것이다. 마치 끔찍한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저분한 물가에서 마주친 왜가리의 섬뜩한 눈깔 같은 것은 벌써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왜가리를 따라 나선 마히토에게 드러난 진실은 죽음과 악의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히토의 키치는 지속될 수 없다. 진실을 대충 덮으려 하는 모든 망상—합리적 기획, 즉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사실 모두 망상의 일종이다—은 그러니 무너져내려야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악의를 달래며 죽음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정해져 있는 붕괴와 불가피한 쇼크들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있는 걸 없는 셈 치지 않고 인정하고 감수하면서.


그렇게 보면 이 영화가 전쟁을 미화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오독들은 어쩌면 일말의 정독일 수도 있겠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전쟁은 삶이 이어지는 한 언제까지나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는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전이라는 구호가 진실을 담보하는 것 아닌가? 당신은 혹시 악의 없는 유토피아가 가능하리라고 믿는 천치인가? 당신 정말 바보 아닌가?—이건 내가 당신들에게 품고 있는 악의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키치와 대면하기 위해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다. 왜가리를 힐끔힐끔 돌아다보며 극장을 떠난 기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고 또다시 각자의 망상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갈 테지만, 아주 잠깐의 잊혀질 시간이 우리를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하리라는 또 다른 망상을, 그래도 한번 품어보는 것이다. '내일의 잼'을 펴바른 빵을 먹는 마히토처럼. 우리가 더러운 물가에 널브러진 왜가리의 시신까지를 품을 수 있도록.


TOMOR...는 아마도 TOMORROW JAM임을 예감케 한다.

+'내일의 잼'은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것으로, '누군가 약속했지만 절대 주어지지 않는 좋은 일' 같은 것이다.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하는 픽션의 허구성과 진실함에 관한 숨겨진 메타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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