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지가 베르토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만 빼고 뭐든지 볼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고 이건 단순한 말장난은 아니다. 여기서의 역설은 그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의 불가시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카메라맨의 카메라맨을 찍는 카메라맨... 엘리베이터의 거울들. 카메라맨은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희붐하게 보인다…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맨의 유령들… 카메라는 자기 외의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보여줄 수 없다. 자기조차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아예 없거나 모르는 건 아니다. 뭔가가 있고, 뭔가가 있다는 사실쯤은 알아차릴 수 있다. 이걸 카메라의 존재론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님 카메라의 유령론?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스스로를 지시함으로써 자신의 독점적 위치를 노정한다. 셀프-레퍼런스로서의 카메라맨. 야바위꾼의 손놀림을 따라 하는 몽타주와 간격을 의심하는 눈썰미…
지가 베르토프는 그가 그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지가Dziga는 우크라이나어로 ‘팽이’를 뜻하고, 베르토프Vertov는 러시아어로 ‘돌리다’라는 동사에서 따왔다. 팽이를 돌린다… 멈출 때까지… <인셉션>적인 가명.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를 떠오르게 하는. 본명은 다비드, 또는 데니스 카우프만이지만 우리는 그를 지가 베르토프로 기억한다. 그건 데니스, 또는 다비드가 기억되고자 하는 방식이었을까?
자기지시적 명사로서의 가명. 다비드와 데니스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실체’를 포착하기를 바랐고, 키노-아이(카메라-눈)로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조리개를 조정하고, 카메라를 겨냥하고, 필름을 마구 돌렸다. 자르고 잇고 붙였다. 그는 복잡한 세계 속에서 인간의 불완전한 눈에 대한 카메라-눈의 우월성을 주장했고, 그것이 인간을 재구성하리라 믿었다. 키노-아이는 인간의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르게, 더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우리는 기계-인간이고, 기계가-아닌-인간이다. 그러니까 베르토프에게 실체는 스스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찾는 자가 찾을 것이요 구하는 자가 구할 것이니…
알 수 없는 채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드는 것처럼… 눈이 영화와 대면할 때처럼… 유운성은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지 말고 ‘어떻게 영화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영화-보기는 영화-하기가 되어야 한다… 내가 아는 건 이거 하나다: 하고 난 뒤의 일은 볼 수 있다는 것. 다만, 그것이 기록되었을 경우에… 그러니까 영화는 항상 과거의 매체다. 우리는 과거를 될 수 있는 대로 풍부하게 저장하고 기록해야 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의 눈으로서의 카메라…
과거를 현재에 함으로써 미래를 전망하는 것—영화-하기가 그런 거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그러모으고 머릿속으로 다시 배치하고 의미의 지도를 매양 새로 그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모든 과정의 기본 조건이다. 우리를 제약하면서 가능성을 열어주고, 기만하면서 겸허하고 솔직한… 흐릿하고 선연한 꿈,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깜빡거림, 가렸다 들췄다 하는 창문의 블라인드. 볼 수 없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어둠을 가리키는 빛으로서의 영화…
지가 베르토프는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형식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미학을 추구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베르토프의 고발자는 키노-아이가 인민들을 현실로부터 떨어뜨리려 한다고 의심했다.
베르토프는 이제 찍고 싶은 것을 찍을 수 없었다. 사물들의 흐름과 상호작용할 수 없었다. 그즈음 누군가 그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었고, 그는 영화로 대답할 수 없었고, 그냥 이렇게 대꾸했다: 저에 대해서는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가 베르토프는 이미 죽었습니다.
자기지시적 명제로서의 죽음. 토템으로서의 팽이…
팽이는 멈췄다.
그 뒤 베르토프는 사라졌다.
그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이제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거기서 세계는 쉬지 않고 상호작용한다. 템포를 조였다 풀었다를 쉴 새 없이 반복하며. 카메라는 끝도 없이 움직인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촬영기사는 미하일 카우프만이다. 그는 그 영화에 등장하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