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김지운, 2023)
※〈거미집〉에서 신상'호' 감독(정우성 扮)이 김감독(송강호 扮)한테 너 자신을 믿으라는 장면이 인상깊었다는 둥의 감상을 봤는데, 이 영화는 그걸 오히려 자조적으로 비웃는 영화에 가까워 보임. 마찬가지로 셔젤의 〈바빌론〉과 비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 보임. 이 영화는 과거의 한국영화판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뭐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영화이기 때문임. 그렇게 본 분들은 한번쯤 읽고 가셔도 괜찮겠습니다. 글이 좀 난삽한데 암튼 요지는 파악하시리라 믿으며
김감독은 고해소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미도는 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그들은 구멍 뚫린 창틈 사이로 ‘걸작’에 관한 얘기를 나누지만, 미도의 전공이 밝혀지지 않듯 그 ‘걸작’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알 수 없다. ‘신神’—그는 신상옥 아닌 ‘신’상호와 申成필림의 ‘신’인가? 아니면 원래 각본가인 ‘신’연식의 ‘신’인가?—은 말을 건네지 않는다. 미도의 말마따나 이 영화는 카프카 같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촬영을 마칠 때쯤에야 김감독은 이를 깨닫는다. 이런 “막장 치정극”이 무슨 걸작이냐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환호성을 보내는데도, 그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다. 〈거미집〉의 감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거미집〉은 왜 송강호가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는 장면에서 끝나야 하는가? 어두컴컴한 구멍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살인의 추억〉)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절 박두만의 핏기 서린 눈발과 달리, 김감독의 눈매는 피곤에 절어 보인다. 그 ‘김’감독이 누구인지는 더 물을 필요도 없겠다. 김지운은 송강호의 얼굴을 레퍼런스 삼아 변주하며, 관객들이 다른 것을 보기를 바란다.
〈거미집〉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이 영화가 허구의 창작물임을 못박는 “실제와는 무관”하다는 낯익은 문구가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창작물이라는 구실을 지레 전시하는 영화들이 자주 그러하듯, 〈거미집〉에서도 허구와 실제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아주 조금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수많은 실제 모티프들에서부터 그물을 뻗었음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거미집〉 속의) 〈거미집〉은 〈하녀〉이며 〈화녀〉이고 〈디아볼릭〉이다. 신상호는 신상옥이고, 김감독은 김기영이며, 또한 김지운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신상’호’ 감독이 불꽃 속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일화는 기묘한 화재로 생을 마감한 김기영 감독의 이야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말인즉슨 모티프와 결과물은 딱 맞게 대응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김감독은 걸작을 낚으려는 심산으로 거미줄을 쳤다. 그러나 줄에 걸리는 것과 걸리지 않는 것은 이처럼 항상 작가의 예측을 빗겨간다. 김지운은 이를 자조적으로 고백한다. 〈거미집〉은 숱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계시를 실현하는 낭만주의적 예술가-영웅담이 아니다(그렇게 봤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완전히 오독한 것이다).
극중 인물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발화되는 ‘플랑세캉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플랑세캉스가 〈거미집〉에서 실현되는가? 전혀. 계단을 거꾸로 타고 오르며 민자의 살인—여기서도 민자는 외부에서 내부로 침투한다—을 관찰하는 장면은 명백히 과시적인 쇼트들의 몽타주—클로즈업되는 민자의 얼굴과 손—로 구성되어 있다. 극중극에서 거의 실현된 듯한 마지막 롱테이크 장면조차 페이크에 불과하다. 오여사(박정수 扮)가 남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상기하자. 스태프들은 화면을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 시각 트릭 장치를 고안하지만 실제 극중극에서 불길은 눈에 띄지 않는다. 민자와 유림이 금고를 두고 다툴 때조차 화마의 기색은 희미하기만 하다. 그들은 (집에 불이 났다는 상황이 아닌) 인물들 사이에서의 긴장감만을 팽팽하게 유지하며, 금괴만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마치 아래층에서 불이 나지 않은 것처럼.
〈거미집〉의 세트장은 외부와 격리되고자 하는, 그러나 실패하고 마는 아수라장이다. 경황없는 소동으로부터 성실하게 거미줄을 자아내는 힘은 정신없이 이어지는 유머와 동선의 리듬감에서 나온다. 씨줄과 날줄로 엮인 배우와 캐릭터들이 합을 주고받으며 일사불란하게 그물망을 친다.
그러나 물론, 그물에는 항상 걸리지 않고 빠져나가는 이물(異物)들이 있다. 그물을 그물로 만드는 것은 그물코다. 메가폰을 잡은 송강호-김감독은 신의 계시를 받은 천재처럼 영화를 완벽히 장악하려 하지만, (카프카의 세계가 그러하듯) 영화는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마찬가지로 한유림은 강호세의 자장을 벗어나며,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한 형사의 추리—'한유림-강호세-짧은 머리 여자 삼각관계?’—도 터무니없이 어긋난다.
말이 나온 김에 형사 얘기를 조금 더 해 보자. 〈거미집〉에는 조직된 대오에서 벗어나 존재감을 억지로 드러내거나 숨기는 배역들이 몇몇 있다. 형사는 그중 가장 눈치채기 쉽게 두드러지는 역할이다. 형사와 그를 따라다니는 인물에게는 아무런 배역이 할당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들은 자유롭게 프레임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세트장을 활보한다. 형사는 분명 터무니없는 추리를 수첩에 끄적였는데, 나중에 수첩을 뺏어 본 백회장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며 빈 수첩을 내던진다. 반대로 이민자의 존재감은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엄폐되어 있다. 그녀는 극중극의 향방을 좌우하는 주인공임에도 흑백 바깥의 컬러에서는 사실상 소거된 인물이다. 그들의 아이러니한 존재감은 거미줄의 탄성을 시험하듯 이질적인 궤적을 그리며 영화에서 튀어나가거나 영화 속에 끈질기게 잔존한다.
거미줄의 탄력이 왕왕 늘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에도 이 영화를 지탱하는 것은 이물들을 다루는 김지운의 태도다. 김지운은 섣부르게 걸러내고 배제하는 대신 끈질긴 협상에 임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를 을러대거나 얼러대는 것처럼. 〈거미집〉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을러지거나 얼러진다. 각각의 욕망과 타협들은 ‘걸작’을 찍으려는 김감독의 욕망에 녹아들거나 이탈하며 결과를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들은 무엇을 마주하는가? 이 영화가 김감독의 상상된 시선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유념하자. 그러나 이때에조차 영화는 속임수를 쓰는데, 흑백과 컬러는 영화 속의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 바깥의 영화로 구분되지 않고 모두 김감독의 꿈으로서 현시된다. 김감독의 꿈은 흑백이 컬러로 전환되는 순간이 아닌 그뒤의 디렉팅 장면까지—물론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호세가 아닌 극중극의 존재, 거미의 화신인 민자뿐이다—를 포괄한다.
촬영을 모두 마친 뒤 김감독은 홀로 앉아 세트장 바깥에서 들이치는 햇빛을 바라본다. 그에게 계시를 내려주는 초월자는 누구인가? 답은 보류되고, 화면은 극중극인 〈거미집〉의 엔딩시퀀스로 이어진다. 감독에게 이름을 부여받은, 그러나 그 이름을 싫어하여 대립하는 한유림은 이민자를 쓰러뜨리고 금괴를 마주하지만, 금괴는 아무에게도 돌아가지 않고, 그들은 모두 거미집에 꽁꽁 묶인 고치가 되며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햇빛을 바라보던 김감독의 얼굴로 돌아간다. 어쩐지 70년대라기보다는 오늘날의 풍경을 떠올리게끔 하는 객석의 가운데서,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박수갈채를 받는 김감독의 표정은 애매모호하다.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 그저 피곤할 따름이다. 왜? 그가 ‘걸작’이라고 부르던 것의 정체가 더 이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그가 상상하던 ‘걸작’을 비웃던 이들은 그에게 찬탄하지만, 그는 그것이 아스피린의 약효와 주변인들의 인생사를 기우고 때워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마지막에 그가 앉아 있는 객석이 70년대의 분위기를 충실하게 재현하지 않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거미집〉은 70년대 한국의 영화제작환경을 낭만적으로 술회하거나 선배들의 제단에 헌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2020년대 김지운의 영화다. 이 영화에서 장애물로 기능하는 검열이나 평론가들의 역할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건 반쪽짜리 독해다(마찬가지로 신상호의 하나 마나 한 조언을 후배 창작자들에게 전하는 가슴 뜨거운 독려로 읽는 것도 잘못이다). 김지운은 예술과 검열의 외재적인 관계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가 고발하려 하는 검열은 창작자의 자기검열이며, 평론가에 대한 볼멘소리 또한 인정욕구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한 자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미집〉의 가장 뛰어난 성취는 이러한 안팎의 대립구도 자체를 교란하여 붕괴시킨다는 점인데, 앞서 언급했듯 흑백과 컬러의 층위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김열의 상상계에 속해 있다. (조금 도발적으로 밀어붙여 보자면, 이 영화 전체가 고쳐 찍을 수 없었던 영화를 다시 찍으려는 그의 꿈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과장되고 허황된 소동극인 것은 그래서다.) 그것은 곧 김지운의 상상이고, 그러나 상상은 무無가 아닌 레퍼런스들로부터 기원한다. 물론 그 영화들은 또 다른 어떤 레퍼런스들로 기우고 때운 누더기이다. 모든 예술은 누더기들로 꿰어 붙인 누더기들이다.
미스터리한 것은 여전히 그를 옭아매는 거미줄과 거미의 정체다. 거미는 어디서 왔는가? 신의 계시처럼 천장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계시처럼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다. 거미는 오로지 영화에서만 존재하고, 우리는 거미의 낌새를 알아차릴 수 없다. 공포스러운 점프컷으로 이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퇴장하는 거미의 존재감은 저택을 찾아온 관객들의 발걸음을 끈끈한 점액으로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이 미스터리의 정체는—조금 뜬금없지만—조지 오웰에게서 구하기로 하자. 「나는 왜 쓰는가」라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오웰은 글을 쓰는 이유를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하고 나서, 이렇게 매조진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동기의 밑바닥에는 어떤 미스터리가 하나 놓여 있다.”
그러니까, 오웰 본인도 모른다는 거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찍는 이유는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김지운은 숱한 악평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계속 찍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앞으로 찍으려는 것이 뭔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다만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쓰고 싶고 찍고 싶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을 사로잡는 뭔가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 허황된 자의식의 인정투쟁.
김감독은 그럼에도 거미를 좇는 사냥꾼이 되기로 한다. 다음 영화를 위해 그는 다시 거미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