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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Sep 01. 2023

속죄의식에서 복수극으로: ‘비 윤리’의 두 가지 방식

〈로리타〉(애드리안 라인, 1997)와 원작의 예술과 윤리

속죄의식에서 복수극으로: ‘비 윤리’의 두 가지 방식


『롤리타』의 해외 표지 중 하나. 개인적으로는 이게 제일 잘 만든 것 같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비 (띄고) 윤리적인’ 소설이다. 이를 작품의 제재나 그걸 다루는 방식이 옳지 못하다는 비난조의 진술—이 소설은 비윤리적이야! 이런 소설은 쓰여서는 안 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나보코프는 애당초 윤리적 재단 따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롤리타』를 소아성애자에 대한 조롱 내지 비판, 또는 인간적인 이해와 양해의 시도로 읽는 것은 모두 이 마법적인 소설에 대한 반쪽짜리 독해다.


『롤리타』의 신비롭고 씁쓰름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한 인간의 근원적 결핍과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헛헛함을 순간이나마 잊게 만드는 불가항력적인 도취에서 온다. (물론 그것은 금기를 위반하는 대가이며 도취의 대가는 다시 죄책감guilty=quilty으로 치러야만 한다.) 층층이 정치하게 조립된 작품의 구조와 넘치도록 과시적인 말장난은 인간 삶의 허용된 틀(윤리)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의 향유에 뒤따르는 도락가의 강박적 스트레스를 드러낸다.



〈로리타〉(애드리안 라인, 1997)

애드리안 라인의 〈로리타〉를 보고 바로 든 생각은 역시 나보코프의 문학적 성취는 다른 매체로 변환하기엔 여의치 않은 종류의 것이라는 점이다. (고다르의 영화를 소설로 번역할 수 없는 것처럼.) 아마 누가 만들어도 마찬가지일 테다. 큐브릭의 62년도 작을 보지 않았기에 단언하긴 어렵지만 그의 〈롤리타〉도 원작의 표층만을 겨우 따라잡기 급급하겠거니 싶다.


문학이 영화의 역동적인 리듬과 촉각적인 자극을 따라 할 수 없듯이 영화 또한 『롤리타』의 촘촘한 중층적 텍스트와 언어적 암시를 재현할 수 없다. 그래서 애드리안 라인은 원작의 표면적인 테마만을 취사선택하고자 한다. 『롤리타』의 표면적인 테마는 무엇인가? 금지된 환상에의 탐닉과 그 후의 환멸, 그리고 뒤따르는 책임에 관한 물음이다. 영화 〈로리타〉는 환상과 환멸을 그려내는 데에는 부분적으로 성공하지만,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성공으로 인해 실패한다.






『롤리타』라는 텍스트를 영화화하려는 감독이 처리해야 하는 선결 과제는 단연 배우의 캐스팅이다.



원작의 돌로레스 헤이즈는 150cm가 채 되지 않는—4피트 10인치는 147cm다—열두 살짜리 앳된 아이지만, 당연하게도 영화는 그런 소녀를 캐스팅할 수 없다. 십대 초반의 소녀를 성착취 대상으로 섭외하는 데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은 둘째 치고 관객들이 그것을 용인할 리 없기 때문이다. 실제감을 무기로 삼는 영화는 소설에 비하면 더 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매체다.


〈로리타〉의 돌로레스는 열네 살로 각색되었고—이는 큐브릭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촬영 당시 배우 도미니크 스웨인은 만으로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 스웨인의 키는 169cm다.[i] (영화의 막바지에 초췌한 젊은 임산부로 분장한 그녀의 모습도 그리 어색해 보이진 않는다.) 실제 정사 씬은 성인 배우를 대역으로 세워 촬영했다. 애드리안 라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ii]


험버트 험버트의 역할을 수행할 배우도 롤리타 다음으로 중요하다. 터놓고 말하자. 라인의 〈로리타〉는 팜므파탈 멜로드라마다. 파국일 걸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만 중년 남성의 순애보다. 어린 의붓딸과 양부의 관계라는 점에서 도덕적 불편함이 부각되는 것은 부득이하지만, 거기에 지나치게 함몰되는 것은 지양하자. 애드리안 라인의 영화는 우리가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도미니크 스웨인만큼이나 제레미 아이언스의 캐스팅도 그러하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섹시함과 선량함을 두루 갖춘 배우다. 도발적이고 버릇없는 돌로레스를 당해내지 못하고 쩔쩔매는 험버트의 얼굴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입장을 양해하게끔 한다(엔니오 모리꼬네의 처연한 사운드트랙까지 겹쳐지는데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나). 이 영화를 보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이쯤에서 『롤리타』가 ‘비 윤리적인’ 소설이라는 처음의 전제를 다시 점검해 보자. 나보코프는 자기 소설의 독자들이 세속적 판관이 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내러티브가 고의적으로 터부를 위반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바, 이를 짚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다.


그럼 『롤리타』의 윤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내러티브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롤리타』의 윤리는 소설의 표층적인 서사에서 충분히 발전되고 소화된다. 이 서사는 험버트가 죄를 짓고 처벌받는 응징의 서사다. 회개는 없다. 회한만 있을 뿐이다. 의붓딸을 범한 양부에게 구원의 기회는 허락되지 않는다. 『롤리타』의 페이소스는 불가역적인 죄악의 기쁨과 괴로움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롤리타』는 속죄의 서사이기도 하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자신의 거울상인 퀼티를 죽이는 이야기다. 퀼티 살해는 돌로레스가 바란 바가 아니다. 험버트가 퀼티를 죽여야만 했던 것은 나보코프가 그리 정해 놓은 까닭이다. 험버트가 죽이려 하는 것은 죄guilty이지만(그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나보코프가 죽이려 하는 것은 죄의식guilty이다. 나보코프는 독자들이 죄책감을 벗어던지고 작품을 작품대로 만끽하기를 바란다.


죄의식을 덜어내고 있는 그대로 보면 롤리타의 매 장면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다. 그건 성애의 환락이기도 하고, 해맑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순수한 기쁨이기도 하며(나는 원작에서 롤리타가 테니스를 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덜(더) 나쁜 죄인이 더(덜) 나쁜 죄인을 벌하는 우스운 블랙코미디를 보고 새어나오는 실소거나 같잖은 정의감이 유발하는 쾌감이기도 하다. 사연 있는 아이에게 품게 마련인 인간적인 안쓰러움인 동시에 회한에 잠긴 죄인의 고백이 자아내는 숙연함일 수도 있다.






예술의 모럴은 거기에 있다. 예술은 삶이 아니다. 삶은 예술 다음에 온다. 말인즉슨 삶 이전에 예술이 있다. 현실의 자질구레한 제약들을 벗어나 금지된 영토를 밟을 때 우리를 엄습하는 두려움과 죄책감은 예술을 즐기는 동안엔 잠깐 비껴 놓아도 된다.


아방가르드의 이상이 금방이라도 실현될 것처럼 보였던 20세기라면 몰라도, 아직까지 예술과 삶을 혼동하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님 불감증 환자거나 섬망증 환자겠지.) 양자가 서로 괴리된 채로 자족하는 영역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예술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 있고, 불가침의 관계로 갈라져 있다. 연속이면서 단절이다. 영리한 도락가는 그 모호함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왕좌왕하며 제 머리를 쥐어박을 게 아니라.


누가 뭐래도 롤리타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소설이며, 독자가 할 일은 충실히 느끼고 두고두고 곱씹는 것뿐이다. 속죄는 험버트가 할 것이니. 다만 우리는 자기 앞의 텍스트에 정직하기만 하면 된다. 그건 삶에 정직해지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애드리안 라인은 바로 여기에서 실패한다. 『롤리타』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결정된 실패.


라인의 〈로리타〉는 도착적 환상을 감각적으로 번역하는 데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장편소설을 영화로 옮기면서 압축된 각본의 부실함이 다소 아쉽기는 해도, 관계에서의 환멸도 그만하면 잘 그려낸 편이다. 그러나 이때의 환멸은 험버트의 부도덕한 행위와 자기기만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기보단 보통의 연인들이 겪을 법한 환멸이거나 관계 자체의 지리멸렬함처럼 보인다. 도미니크 스웨인의 돌로레스 헤이즈는 가여운 열두 살배기 돌로레스 헤이즈가 아닌 까닭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어린아이가 아니다. 스웨인은 뇌쇄적이고 도발적인 생기 넘치는 어린 연인—나이가 좀 든 남성들의 영원한 판타지—을 완벽하게 연기해 낸다. 험버트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험버트를 완벽하게 쥐어잡고 마구 흔들어댄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선량한 눈매에 울화를 머금고 돌로레스의 뺨을 두어 차례 올려붙일 때조차 관객은 그 폭력을 그리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차라리 속 시원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가 도덕적으로 무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라인의 〈로리타〉와 아이언스의 험버트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속죄의식을 치르게 된다. 속죄가 아니라 치정으로 얽힌 복수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쯤 되면 짐짓 처연해 보이던 수미상관 구조마저 부정교합이 아니었나 의심스럽다.


속죄인 척하는 이 복수극을 우습게 만드는 것은 돌로레스가 퀼티를 사랑할지언정 험버트를 사랑한 적은 없다는 쓰라린 사실이다. 말하자면 〈로리타〉는 자기를 사랑한 적도 없는 여자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죽이는, 괴상한 질투 이야기인 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인간의 양심이란 /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이라는 원작의 시구가 무색하게도, 〈로리타〉는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다. 내러티브 자체에 내장된 윤리적 긴장감은 소년미를 간직한 미중년 남성의 북 치고 장구 치는 멜로드라마로 미적지근하게 녹아버리고 만다. 말하자면 애드리안 라인의 〈로리타〉 또한 ‘비 (띄고) 윤리적인’ 영화다. 하지만 이때의 ‘비 윤리’는 나보코프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


나보코프의 야심이 내러티브의 표면 너머 예술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까지 닿아 있다면, 애드리안 라인은 단지 내러티브의 페이소스와 제재의 파격만을 차용한다. 층위를 넘나드는 원작의 복잡다단한 텍스트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 〈로리타〉의 ‘비 윤리성’은 감독 자신이 다루고 있는 재료에 불가피하게 뒤따르는 윤리마저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방기한 데 있다. 〈로리타〉는 매혹적이지만 싱거운 영화다. 아버지가 어린 딸을 범한 이야기가 싱겁다면, 그건 영화가 ‘비 윤리적’이라는 방증 아닐까. 아님 내 입맛이 잘못됐거나.






[i] 도미니크 스웨인의 키는 구글 검색 결과마다 다르게 나오는데 대충 5피트 6.5인치에서 9인치(169~175cm)를 오간다. 촬영 당시 키가 얼마인지는 특정할 수 없으나 눈대중으로 봐도 160은 너끈할 듯하니, 소설에 묘사된 돌로레스 헤이즈보다 훨씬 성숙하게 보이는 건 분명하다.


[ii] 이러고서도 〈로리타〉는 배급사를 찾지 못했고, 62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이고서도 미국 내에서 고작 110만 불밖에 벌어들이지 못했다. 아마도 배급하는 쪽에서나 영화를 보는 쪽에서나 윤리적인 부담감이 적잖았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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