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nui Jun 13. 2024

부엉이는 부엉부엉 울지 않는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 자음과모음 서평

#알려지지않은밤과하루 #자음과모음 #서평단



https://www.youtube.com/watch?v=07WXXtF1tyw


어쩌면 추리소설인지도 모른다. 대강 이렇게 전개되는.


흰 무명 천 너머 흔들거리는 실루엣의 희미한 흔적을 눈으로 쫓는다. 흔적은 “실체가 아닌 형체들”이며, 질량이나 부피를 갖지도 않고, 그나마 윤곽조차 흐릿하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임의로 정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조금도 침범하지 못”한다(이건 제발트의 문장인데, 배수아가 번역한 것이다).


그때 창문 너머에서는 “예리하게 날 선 보랏빛이 늙은 부모인 회색빛 흐릿한 어둠을 살해”하는 중이다. 그 장면은 눈먼 부엉이의 시신경에 전달되는 신호의 파도 같다. 해는 뜨겠지만 그들은 눈을 뜰 수 없다. 막연하게 흔적을 좇을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러니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그들의 밤과 하루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다. 알려지지 않은 채로. 이 도시의 숨겨진 이름은 ‘비밀’이다.






어둠은 어둠인 이상 방 안 좁은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다(이건 이상의 문장인데, 내가 적당히 번역한 것이다). 존속을 살해하려 한 보랏빛이 창문의 프레임에까지 넘실거린다. 세계와 개체의 구분선이 가물거린다. 그림자의 군사들이 붉게 피를 흘린다. 흰 무명 천으로 만든 옷이 피에 젖는다. 아니 물인가?


그 순간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진다.


“헤더야트는 이란의 작가로 『눈먼 부엉이』는 그의 대표작이죠. 고통과 몽환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염세주의 미학으로 이름 높은 작품입니다. 특히 작품의 곳곳에 등장하는 신비한 반복 진술이 환상과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느끼게 합니다. (…) 그의 생애에는 알려진 자살 기도가 한 번 있었습니다. 스물네 살이던 해 그는 파리에서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그는 센 강변 으슥한 곳의 한 낡은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리 아래의 보트에서 한 쌍의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남자가 즉시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익사 직전의 헤더야트를 구했습니다. (…)”


그는 물속에 있다. 오래전부터 물속에 있었던 것 같았고, 물속에서 빠져 나가는 법도 알지 못한다. 검은 강물과 새벽 공기의 모호한 경계에서 어푸어푸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누군가 생각한다. “거기에는 물결이 만드는 작은 떨림 같은 것도 있고 낯선 외로움 같은 것도 있다. 결국 물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이장욱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배수아는 이렇게 쓰지 않는다.


사데크 헤더야트는 물속에서 빠져나왔거나 끌려나온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다시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계선을 지우는 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을 수 있다. 넘나들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그저 지우기 위해서거나.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선 우선 경계를 전제해야 하고, 그래서 그런 작가들은 선을 흐리게 뭉갤지언정 아예 지워 버리진 않는다. 때로는 오히려 선명하게 긋기도 한다.


배수아나 제발트 같은 작가들은 아무래도 넘나들지 못하는 쪽이다. 그들은 쪼그려 앉아서 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벅벅 지운다. 그런 다음 번쩍 일어나서 걸어 보지만, “순간적으로 갑자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좌표의 혼란을 겪는다. 이들에게 혼란은 비일상적인 사건이라기보단 늘상 겪어온 삶의 조건이다. 원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현기증을 극복하는 법을 모른다. 글을 쓰는 것밖에는.






정지돈은 사데크 헤더야트의 소설에서 이름을 빌려 소설을 썼다.「눈먼 부엉이」에서 그는 눈을 감거나 반쯤 뜬 채로 말한다.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니 글을 쓰라고.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고.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배수아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두 권 번역했다.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한 권 읽었다. 『아구아 비바Agua viva』라는 소설인데, ‘아구아 비바’는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이고, 보통은 해파리를 말한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낯선 포르투갈어를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국역본의 제목으로 옮겼다는 점이 눈에 띈다. 편집자 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살아 있는 물'은 뼈대 즉 특정한 형태를 강제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이며, 그 살아 있는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해파리는 그 세계와 가장 닮은 개체다. (…)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것, 심지어 세계인 동시에 개체인 것을 그리기. 즉 모든 구조와 경계를 넘어선 그 무엇을 기록하려는 (불가능한) 시도. (…)


배수아는 이 소설을 번역하거나 편집하지 않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2uyHtg56yTY



갑자기 어디선가 라디오가 켜졌고, 어절마다 뚝뚝 끊어지는 오디오북이거나 아주 오래전에 들어본 노랫소리 같은 음성이 공중에서 흘러나왔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는. 상처가. 있다."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 소설을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추리가 성립하려면 사건의 실체가 있어야 하지만, 말했다시피 여기에는 “실체가 아닌 형체들”만 있다. 형체들의 희미한 윤곽이 소설의 세계를 온통 잠식해 온다. 이 세계에는 뚜렷함이나 질량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안팎이라는 구분도 전연 무의미하다.


그걸 환영이라고 부르든 그림자라고 부르든, 좋다. 저절로 켜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출처 불명의 낯선 음성처럼, 배수아의 언어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간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품은 꿈과 어둠, 그러니까 비밀의 도시로.


거기서 우리는 물속에서 꿈꾸는 것 같거나, 무더위에서 신기루를 보는 것 같다. 아야미, 여니, 마리아, 얼굴이 얽은, 힘줄이 불거진 앙상한 다리, 시인이거나 은퇴한 무명 배우인, 극장장이거나 부하인,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면서 여자인… 정체성의 증폭과 중첩은 소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게 만든다.


단지 다음의 두 대목을 나란히 포개어 놓고 여러 번 읽어볼 따름이다. 둘 다 배수아가 썼고 나나 당신이 쓸 수도 있었을 문단이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고립되어버리지 않을까요? 단 한 사람도 설득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또한 그 누구도 우리의 무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혼자서 고개를 돌리고 아주 멀리 가버려야 한다는 의미잖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 말이죠. 우리는 평생 동안 황야에서 양들과 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별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양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면 당신은 세상은 변함이 없노라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슬픈 자의식조차도 마침내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고독해요, 아야미.”(75p)
"당신이 편지에서 쓴 것처럼..." 극장장이 말했다. "이제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아야미는 극장장의 머리를 껴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가만히 놓았다. 그리고 그가 구토를 다 마칠 때까지 대못의 뭉툭한 대가리가 만져지는 피투성이 정수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오래오래 쓰다듬었다. 마치 그것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두 인간이 동시에 한 장소에 있기 위한 유일한 주술의 몸짓이라고 믿는 것처럼. (243p)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나, 시대는 시대, 소설이 거기에 있기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