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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lly Jul 31. 2021

나의 도덕경 이해

道德經

나의 도덕경 이해

  ‘道’ 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논의되어 온 질문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도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역사상 많은 성인들 조차 도가 존재함을 알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규정하기 힘들었다. ‘도’라는 것이 상대적인 것이라 각각 저마다 느끼는 ‘도’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도’라는 것은 항상 그 자리에서 돌아가고 있는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처럼 우리 삶 속에 어디에나 스며들어있어서 우리 인생의 회전목마를 돌아가게 하는 듯하다. ‘도’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어떤 식으로든 간에 우리들 삶 속에서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동안에도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라는 것은 항상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랬던 것이 생각해보니 ‘도’이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 같다.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때 아니면 특정 상황에 “아 이것이 ‘도’에 해당하는구나” 하고 그때그때 생각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집안 전체가 절망적으로 변하고 흔들렸지만 그 계기로 우리 집 식구들은 더욱 독해졌고 서로 끈끈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우리 가족이 더욱 부지런해지고 서로를 위해주며 산 것, 이것 때문에 우리 가족은 일종의 ‘도’를 체득한 것 같다. 물론 어려움이 찾아오면 그 어려움으로 인해 강해지는 것이 순리처럼 느껴지지만, 이것이 나에게 찾아온 혹은 적용된 ‘도’ 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것을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느낀다. 또 내가 어릴 적부터 축구를 좋아하게 되어 축구를 운동 중에 제일 많이 하게 되었고, 축구를 할 때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즐기면서 했기 때문에 축구를 잘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내가 경험한 내 나름의 ‘도’이다. 내가 전적대학교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그곳에서의 대학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학교로 다시 입학하게 된 것도 내 나름의 ‘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도’에 대해 내 마음대로 떠들어 대는 것이 물론 ‘도’에 대해 내가 정확히 알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느끼고 주장하는 이러한 ‘도’라는 것이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그래서 ‘도’라는 것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엄청나게 많은 설명이 필요하기도 한 것 같다. ‘도’라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이어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또 반대로 비어있는 상태인 것이 ‘도’ 이기도 한 것 같다. 이렇게 ‘도’에 대해 알려고 하면 알려할수록 허공에 있는 뜬구름만 잡는 느낌이다. 사람이 왜 숨을 쉬면서 살며, 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왜 영원한 건 없는지, 이렇게 질문은 있으되 해답의 끝, 즉 궁극의 마지막 해답은 없을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단편적일 뿐, ’도’가 그런 것 같다. 궁극적으로 찾아 들어가면 그 모든 질문들 뒤에는 엄청나게 흐트러져 있는 문제의 복잡성만이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진짜 진정한 ‘도’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도’라는 것은 근본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 과정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깨달음 자체를 ‘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을 깨닫기 위해 가는 수행 과정을 ‘도’라고 하는 듯하다. 이렇게 사람이 어떻게 처음 태어나서,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인지를 아는 근본의 참된 뜻을 깨닫는 수행과정이 그 본체인 것 같다.  


 내가 이러한 삶을 살아온 것도 내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것도 모두 ‘도’에 적용받아지게 될 것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1남 4녀의 집에서 태어나서 아버지 없이 자라게 된 이 환경이, 그리고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남들처럼 교육과정을 다 지나고 성장해가며 결국 마지막은 죽음으로 가는 나의 인생 과정이 어쩌면 ‘도’라는 것을 체득해 가는, 근본의 진리를 배워가는 수행과정이라고도 느낀다. 특히 최근에는 더욱 그러한 듯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도’를 완전히 체득하거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은 또 아닐 것 같다.  ‘도’라는 게 그렇지 않을까?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죽기 직전에 눈을 감으며 내 인생을 돌아보면 “아 그때 내가 그건 해봤어야 지금 후회가 없는데 혹은 아 그때 그건 정말로 하지 말았어야 했어”라며 죽음 앞에서 내 인생을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성찰했을 때, 그때도 ‘도’를 안다고 할 순 없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삶을 살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의 변화에 대해 잘 느끼고 이치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가는 것이 ‘도’를 체득하는 것과 닮아 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각자의 삶은 모두 다르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라는 것은 체득할 수 있다고 해서 체득되는 것도 아니기에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는 ‘도’를 알기는 힘들 것 같다. 아니 내 개인적으로는 죽을 때가 되어서도 죽기 싫다는 생각이 ‘도’에 관한 생각보다 먼저 들 것 같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노자의 도덕경 1장에 맨 처음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의 의미인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를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처럼 도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도라는 것이 딱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라는 것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곳곳에 늘 존재하여 우리 인생의 회전목마를 돌리지만, 모두 각자의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저마다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 것 같다. 



'德' 이란 무엇인가?


 흔히 우리가 “덕을 쌓는다”라고 할 때도 착한 일을 한다거나 고마운 마음을 얻게 하는 뜻으로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생각한다. 


 옛날 중국 고대시대에는 ‘덕’이라는 것이 정치의 구체적 방법이었다. ‘구덕’이라고 하는 아홉 가지 덕을 말하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덕을 성인들이 행한 강함과 부드러움의 통치 법을 조화롭게 실천하려는 절개와 지조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그냥 우리가 사는 세상에 덕이 있고 또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의 덕은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든 도덕적인 의지로 선을 실현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내가 생각하는 덕은 바보가 드는 적금 같은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보처럼 꾸준하게 오랫동안 좋은 일을 하며 살았을 때 생기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선행을 할 때 가식 없이 진심으로 하고 보상받기를 바라고 그런 선행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덕을 행하고 좋은 일을 했다고 하여 생색을 내는 것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고마운 마음을 얻지 못한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자면 ‘giver’가 되는 것인 것 같다. 나는 ‘덕’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릴 적 착하기만 한 우리 어머니 때문에 ‘바보가 드는 적금’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 같다. 어머니에게 항상 듣고 자란 말은 “남에게 해롭게 행동하지 마라.”였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성적표를 엉망으로 받아와도 어머니는 별말씀을 안 하셨지만 친구를 괴롭히거나, 나의 행동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면 혼이 났다. 어머니는 자신이 밖에서 손해를 입고 와도 별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손해를 되갚아주려는 시도라도 하는 것을 난 본 적이 없다. 나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만 해도 너무 착하기만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어머니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변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로만 있고 난 그것이 이상하면서도 너무 신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 주변에 좋은 사람만 있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 이유가 정확하진 않지만 나는 이것이 어머니가 60 평생 덕을 쌓아오신 거라 생각한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무조건적인 선행은 아니어도 항상 남을 도우려는 마음가짐과 또 그것을 행함에 있어 가식 없이 행하신 것이 나의 어머니가 행하신 ‘덕’이라고 생각한다.  ‘덕’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신이 덕을 행하고자 한다 해서 행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덕이라는 것이 우리가 행했던 것에 보상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알아서 무엇인가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진정성 있게 남을 도와왔다면 그에 맞는 일이 또 일어날 것이며 반대로 내가 나쁜 행동들을 많이 했으면 내가 행한 덕이 하나도 없으니 또 그에 맞는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한다. 나는 나의 어머니로부터 ‘덕’의 개념을 실제로 어느 정도는 보았기 때문에 착하고 정직하게 살면 덕이 쌓이고 그 덕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덕이란 장롱 속에 넣어둔 속옷과 같다”라는 말도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장롱 속에 넣어둔 속옷의 의미가 나중에 따라오는 이로움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덕을 쌓으려면 사람을 만날 때 계산하지 않고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을 만나든 동성을 만나든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계산적으로 변하게 된다. 사람이기에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관계를 맺을 때는 아까 위에서 말했던 ‘giver’가 되는 것이 차라리 좋은 것 같다. 내가 손해 볼 것을 생각하는 순간 인간관계가 아니라 비즈니스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처럼 ‘덕’을 행하는 것은 힘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덕’은 내가 아는 ‘정직’과 가장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아도 정직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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