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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백삼홈 Apr 15. 2022

막차는 타는 게 아니다.

펀드. 주식에 이어 코로나19 확진까지 막차에 올라탔다.

2007년 차이나 펀드 광풍이 몰아치고 살짝 식어 갈 때쯤 펀드에 가입했는데 거의 막차 수준이었다. 그리고 14년 후 공매도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너도 나도 영혼까지 끌어 모으며 주식 열풍이었던 그때쯤, 주식을 시작했다.그것 또한 막차였던 것 같다. 재테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용감히 마지막 순간 잡아 뒤늦게 탑승을 했고, 크게 손해 안 본 게 다행히 되어 버렸지만 재미도 보지 못한 채 결국 막차에서 내려야만 했다.

나름의 실패 요인을 분석해보면, 재테크에 대한 무지함, 광풍의 끝자락을 잡아 막차에 탑승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재테크에 손절 했다.


결혼 전 경기도권에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학교와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늦지 않기 위해 먼저 일어선 날들이 많았다. 야근을 해도 막차 전에는 무조건 가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막차를 타본 경험이 전무했고,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한 걱정이 많은 편이라 더 그러했다.(막차보다 늦게 귀가하는 경우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서울로 혼자 독립을 시작하면서 뒤늦게 막차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남편과 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즐기고,  마지막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막차를 타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건 그때뿐이었다.


코로나19 확진자의 수가 정점을 찍어 갈 때쯤 자신의 주변에 확진자가 없으면 대인관계를 의심해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 집 건너 코로나19의 확진이 지속되었다.

우리 가족의 확진 소식에 어떤 이들은 확진의 순번 뽑기를 하고 기다리는 듯하다 했고, 어떤 이는 자기네 신발장까지 온 것 같다고 했으며, 어떤 이들은 이 시점에서 걸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고들 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점자 줄어들고 있던 어느 금요일 저녁

5학년 된 아들에게 같은 반 친구들의 코로나19 확진 사실을 전해 들었다.

"엄마, 우리 반 친구 누구누구 안 나왔어~. 다 코로나 걸렸데"

"너랑 같이 어울리는 학교 친구들 아니니? "

"맞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싸늘함이 느껴졌고 조금 슬픈 예감이 들었다.

새벽 5시. 안방으로 아들이 쓱~들어왔다.

"엄마, 나 잠을 못 자겠어요"

"그래? 여기 와서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자"

그때까지만 해도 무서움 꿈을 꾼 줄 알았다. 아들을 옆에 눕히고 안는 순간 몸에서 열을 감지했다.

체온을 재어보니 39.7도! 태어나서 이렇게 높은 온도는 처음이었다.

코로나19에 감염되었구나 싶은 생각에 먼저 해열제를 먹이고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아들은 양성이었고, 나머지 가족은 음성이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들은 격리에 들어갔다. 온 식구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주야로 고열과 싸우는 아들 곁에는 내가 있었다. 주말 지나고 PCR을 하기 위해 나머지 가족이 검사를 했다. 이 매운맛은 언제 해도 아프고, 맵다.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증상이 없었던 우리는 당연히 음성을 예상했지만, 무증상으로 1학년 딸이 양성이 나왔다. 그날 밤부터 딸의 열이 시작됐다. 그동안 딸과 함께 잤던 남편은 거실로 나가고, 열 떨어진 아들은 방에서 각각의 격리가 시작되었다. 기분 탓인지, 잠복기인지 계속 목이 아팠다. 아이들이 확진 후 엄마들이 확진되는 경우가 많다고 병원에서 들었다. 자가 키트로 2번, 신속항원으로 3번 끝에 아들의 격리 해지를 하루 남긴 채 나 홀로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

결국, 이번에도 떠나가는 막차를 잡아 탄 심정이었다.


아들로 시작인 격리를 2주째 강제와 반강제의 격리생활에 들어갔다. 아이들과 온전히 있는 시간을 방에서 보내긴 어렵다고 판단하여 결국, 음성으로 남은 남편이 홀로 방에서 격리를 시작했다. 남편은 쓸쓸해했고, 도와주지 못함에 미안해했고, 많이 안타까워했다.

매일 퇴근 전에 '저녁에 뭐 사다 줄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어디 아파? 괜찮아?'의 전화와 메시지만 울리는 반복된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열 떨어진 후 금방 건강해져 집안을 날아다닐 지경인데 뒤늦게 혼자 몸살, 인후통, 불면증까지 코로나19를 온전히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코로나19가 확진되면 배달의 민족으로 살아간다 말처럼, 음식을 시켜먹고, 집도 대충 정리하고 종일 누워도 보고 했지만 아이들과 24시간 붙어 있다 보니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배달 음식도 꺼내서 챙겨줘야 했고, 심심해하는 아이들과 보드게임도 몇 번 해 줘야 했다.

평소 육아를 늘 함께하는 남편의 빈자리가 어느때 보다 커도 너무 크게 느껴졌다. 몸이 아프니 자꾸 짜증이 났고, 집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하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배달음식도 두어 번 시켜먹으니 물려서 입맛도 없고 반찬가게의 반찬은 맛없다고 먹지 않았다. 남편에게 부탁해서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어 아이들과 먹었다. 7일 후에도 감염이 될 수 있다고 해서 해지후에도 어느정도의 격리와 독박 육아시간은 길어졌다. 심리적으로 무척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한참 먼저 격리가 해제된 딸은 피아노 학원 다녀오는 길에 엄마 보여 준다며 꽃 사진을 잔뜩 찍어왔다. 괜스레 눈물이 났다.우울하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고, 엄마 생각해 주는 딸 마음에 고맙기도 했다.



격리 해지 날.

코로나19 바이러스 따위는 다시 우리 집에 남아있지 못하게 하리라는 굳은 의지로 온 집안 소독에 나섰다. 방역업체처럼, 손잡이 하나부터 바닥까지 소독약을 뿌리고 닦았다. 집안의 식기는 모두 꺼내 열로 소독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모든 침구를 고열로 세탁하고, 살균했다. 격리 후 이틀 동안 이러한 과정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집안 소독, 식기 소독, 침구 소독 간단해 보이지만 식구들의 수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남편은 결국 음성으로 끝났기에 더 꼼꼼해야 했다. 격리가 끝나고도 마스크를 쓰고 더 조심했다. 10일 되는 날까지 장갑을 끼고 맛을 보지 않고 반찬을 하고, 온 식구가 모두 흩어져 밥을 먹었다. 모두 남처럼 말도 안 하고 그저 밥만 먹었던 쓸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이들처럼 바로 회복하지 못하고, 가래와 기침을 하며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모든 일들을 해야 함이 힘들었다. 남편은 같이하자고 했지만 이미 감염된 사람이 하는 게 맞는 거 같다며 극구 거절하고 혼자 해내야 했다.


격리가 시작되고 해제 날이 먼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어느덧 보통의 날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장갑을 벗고, 반찬을 만들었다. 마스크는 여전했지만 조금 더 얇은 마스크를 꼈다. 그동안 하지 못한 집안일을 했다. 꼼꼼히 닦고, 치웠다. 청소기까지 분해하며 깔끔을 떨어봤다. 이때의 기분은 역병과 싸워 끝내 이겨낸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감염되었지만 지금은 비로소 승리한 듯한 기분이다.


한창 코로나19가 확산될 때는 매일 같이 평범한 일상이 감사했다. 오랜 시간 지친 틈을 감사하다는 일상에서 투덜거렸던 일상을 후회했다. 어쩌면 그때쯤 역병이 막차처럼 날 찾아왔고, 놓치지 않고 잡아 탔지 싶다.


당분단 꽤 오래도록...한창을 내달림 끝에 찾아오 막차는 절대 잡아 타지 않겠다 아주 센 다짐 해 본다.

설령 그 막차에 BTS가 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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