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
청춘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 키에르케고르
늘 때가 있는 법이다. 푸른 봄[靑春]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황혼(黃昏)은 어김없이 목전에 닥친다. 지나간 청춘의 빈자리는 안정과 규칙이 차지하고 미처 메워지지 않은 틈에는 우울과 권태가 기어든다. 저무는 해를 붙들어 세우지 못하는 무력감을 체감할 때, 인간은 나이를 먹는다. 시간이 더 이상 제멋대로 흐르지 않고 빠르게 하루를 집어삼킬 때, 사랑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이제 얼굴에 남은 거라곤 선명한 주름과 무채색의 무표정뿐이다.
그러니 이제 꿈에서, 청춘이란 산뜻하고도 요지경인 꿈에서 깨어야 할 시간이다. 꿈에서 깬 대가는 사뭇 가혹하다. 중년이란 명명 아래엔 일상의 반복이 토해내는 무감각만이 너저분할 따름이니. 같은 자리를 기약 없이 맴돌며 배회하는 자 곁을 지키는 건 더는 젊지 않은 몸뚱이와 점점 짙어지는 죽음의 그늘 밖에 없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중년을 맞이한 네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마르틴(매즈 미켈슨), 톰뮈(토마스 보 라센), 피터(라스 란데), 니콜라이(마그누스 밀랑)는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해져 버린 일상에서 그들은 표정을 잃고 쳇바퀴를 돈다. 학생들에겐 무시당하기 일쑤고 사생활은 위태롭다.
그러다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 축하 자리에서 노르웨이 심리학자의 술에 대한 가설이 등장했다.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콜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가설. 마르틴은 잃어버린 활기와 욕구를 되찾고자 “결핍된” 혈중 알콜 농도를 수혈하기로 과감히 결정한다.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곧 나머지 세 명도 이 실험에 동참한다. 넷은 최소 0.05%의 혈중 알콜 농도를 유지하고 오후 8시 이후엔 금주한다는 두 가지 규칙을 정하고 진지하게 실험에 임한다.
낮술의 진가(?)를 미처 알지 못했던 덴마크의 네 중년 남자들은 그리하여 혈중 알콜 농도에 맞춰 일상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과연 주(酒)님은 이들을 구원해 주실까.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실까.
시작은 순조로웠다. 적당한 취기는 위축됐던 태도에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리멸렬했던 수업 내용이 바뀌고 학생들은 대할 때도 주눅 들지 않게 됐다. 수업은 활기를 띠고 건조했던 사생활에는 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근본적인 문제를 마주하지 않고 방편으로 택한 것에 의존하면서 문제는 처음보다 심각해진다. 약과 독은 본래 같은 것이라 하지 않던가. 숙취가 오기도 전에 알콜 부족은 찾아왔고 한 잔의 술은 쉽게 다음 잔[another round]들로 이어져 0.05%를 넘어섰다. 알콜 농도는 점점 짙어지고 되찾은 듯했던 활기는 취기 속에서 금세 증발했다.
결국 일상이 무너졌다. 나뒹구는 술병들 사이에서 권태와 우울, 무기력은 더욱 힘차게 몸을 부풀리니까. 그 끝에서 마주하는 건 파괴된 일상과 애써 외면했던 문제, 그리고 죽음뿐이다. 주(酒)님의 품에서 다시 꾼 청춘의 꿈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로 깨진 채 조각난다. 본래 꿈이란 깨기 마련이고 결핍이란 알콜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언제나 그렇듯.
결핍은 늘 존재한다. 우리가 거기에서 태어나 헤매고 끝내 그것을 품은 채 죽는 탓이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인간은 이미 불완전하다. 엄마라는 존재가 없다면 한 생명이 태어날 수 없듯이. 이 불완전함이 인간으로 하여금 꿈을 꾸고 사랑을 하게 한다. 네가 나의 빈 공간을 채워 오롯해지는 꿈, 사랑으로 온전해지는 꿈 말이다.
그러나 꿈을 꾸고 사랑을 할수록 우리는 깨지고 부서진다. 오히려 그럴수록 서로의 결핍만이 여실히 드러날 뿐이니까. 그러니 결핍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영화 속 네 중년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정신을 놓고 깽판을 치고 난동을 부려도 그것이 거기에 그대로인 것처럼. 세월을 먹은 그것은 더 낯설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흔히 갱년기라 부르는 때늦은 방황은 결국 시간을 축적해 더욱 단단해진 결핍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그것도 권태까지 곁들인 아주 하드코어한 방식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일수록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을 테다. 풍요로운 조건 속에서 인간은 내면의 텅 빔을 헤아리고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혼자라면 더더욱 힘든 시간일 것이고. 기댈 곳을 찾지 못해 술병 주변을 배회했던 톰뮈가 결국 스스로 바다에 몸을 내던졌듯이. 사라지지 않은 결핍은 끝내 사람을 집어삼킨다.
영화 마지막에서 마르틴은 학생들의 졸업식에서 춤을 춘다. 바람난 아내는 집을 나가고 절친한 친구는 자살을 한 순간, 그러니까 자신의 안정적인 기반들이 모두 내려앉은 순간, 마르틴은 십 대들 속에서 함께 춤춘다. 누구의 시선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가장 모자라고 초라한 모습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는 비로소 온전한 듯 보인다.
결국 결핍이란 해소가 아니라 수용의 문제가 아닐는지.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권태는 무너지고 일상은 회복한다. 나와 네가 모두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껴안을 때, 우리는 도리어 완전해진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기대어 살고,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그때 다시 꿈을 꾸고 사랑을 할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더라도. 초연히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을 맞이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