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2022),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이해는 수동적이다. 그래서 늘 벼랑 끝에서야, 이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고서야 겨우 시작된다. 그것은 불가피할 때만 도래한다.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을 때, 어떤 정당화로도 피할 수 없을 때, 아무리 체념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말이다. 가령 죽음 같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이 필연적 계기로부터 시작한다. 외동딸인 화자는 유일한 상주로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다. 소설은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이 사흘간의 여정을 그린다.
장례식장이란 참 요상한 공간이어서, 거기서 부재는 존재를 부르고 침묵은 목소리를 얻는다.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 그의 인연들이 모여 그 존재를 부활시키니, 기억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붙어 어떤 초상을 만든다. 아버지의 이 초상은 화자에게 어딘가 익숙한 한편 낯설다.
화자에게 아버지는 오로지 유물론자, 합리주의자, 사회주의자였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늘 유물론적 논리를 들이밀었던 남자였으니까. 이를테면 이랬다. 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에서조차 인간의 시원을 발견하고, “죽으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암 디나 뿌레삐라”라고 미련 없이 말했으며, “오죽했으면 글겄냐!”며 자기 손해 보는 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을 온몸으로 도왔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란 아내의 잔소리를 유물론적 논리로 받아쳤음은 물론이고, 합리주의적 사고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예쁘단 소리는 절대 못했으며, 민중을 위한다는 이유로 자기 식구들이 고생하는 것은 일체 개의치 않았다. 화자에게 고상욱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화자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가 늘 고아리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빨치산으로서 살았으니까.
화자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이상하리만치 태연하고 침착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절제된 감정과 차가운 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단정함은, 고상욱을 아버지가 아니라 빨치산으로 여기는 탓일 테다. 화자에게는 분명 어쩔 수 없는 연유들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고 그와 화해할 수 없는 이유 말이다.
1980년대까지 빨치산이라는 이유로 연좌제가 공공연히 시행됐다. 화자는 고등학교 때 연좌제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좌절을 한 경험이 있고, 그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아서 결국 오래 만나던 사람과의 결혼까지 포기했다.
화자는 억울했다. 아버지는 스스로 빨치산이기를 선택했던 거지만 자기는 아니었으니까. 태어나고 보니 부모가 빨치산이었을 뿐인데.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화자는 늘 고아리가 아니라 빨치산의 딸로서 호명되었다. 이 부조리함을 견디고 버텨온 화자에게 고상욱은 아버지이기에 앞서 빨치산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여 장례식장에 조문 온 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화자에게 조금 난감하다. 여인네에게 농도 치고 우파 친구와 실랑이도 하고 신념보다 도리를 우선시했던 구례 토박이 고상욱은 어색하고 낯설다.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의 인연들이 보여주는 이 모습들을 마주하면서 화자는 점점 상기한다. 전기 고문을 당하기 전 사시가 아니었던 얼굴의 아버지, 자랑스러운 형이어서 동생(작은 아버지)에게 미움받지 않았던 아버지, 부인에게 잠자리를 졸랐던 남편으로서의 아버지, 그리고 고아리의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이해는 보지 않던 모습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개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어서 우리는 종종 체념한다. 그게 역사적인 조건이건 정치적인 이해관계건 사회적인 여건이건 간에.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고 그중 체념이 가장 손쉽다. 혹은 남 탓을 하거나. 체념과 남 탓은 이해를 지연시키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리하여 화해는 영원히 가능하지 않을 듯이 지평선 너머로 밀려난다.
대상에 대한 이해는 결여된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대상을 수용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니까. 무엇이든 적이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 적이 분명하면 나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 된다. 때로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은 이따금 하염없는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화자의 작은 아버지가 그랬듯이.
작은 아버지는 평생 아버지, 곧 자신의 형을 미워했다. 그 때문에 인생을 송두리째 뿌리 뽑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빨치산이 뭔지 몰랐을 때 그는 똑똑한 형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형을 잡으러 온 국군들이 고상욱을 찾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어 얘기했다. “우리 짝은성”이라고, “짝은성이 문척멘당위원장”이라고. 그러나 그 순진무구한 마음이 결국은 자신의 아버지를 눈앞에서 죽게 만들었다.
비극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진다. 정치와 역사가 태연자약하게 개인의 삶을 집어삼키고 지배하듯이. 한 인간이 이 처참한 상황을 짊어지고 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죽지 않고도 그 기억을 버텨낼 방어막이 필요하다. 아버지에 대한 작은 아버지의 미움은 그렇게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아버지는 그를 보면 떠오를 수밖에 없는 비극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다지도 아버지를 밀어낸 것이 아닐는지.
이해란 것은 이상하게도 혈육일 때 더 어렵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유전적으로 가까울수록 이해보다 오해를 먼저 한다. 아마도 핏줄이라는 사실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너무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래서 가족일수록 우리는 지금 내가 보는 당신의 모습이 전부라고 오인한다. 지척에 있기에 더 노력하지 않고 잘 안다고 쉽게 단정 짓는다. 이 오인은 끈질기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닫게 한다. 그 결과 실수는 반복되고 상처는 아물지 못한 채 곪아간다. 인간의 미욱함이란 이런 데 있는 것일 테다.
이 미욱함이란 것도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계기 앞에선 풀이 꺾이는 모양이다. 작은 아버지가 끝내 발인하는 날 장례식장에 모습을 비췄듯이. 그는 평생을 원수 대하듯 했던 아버지의 장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장밋빛 인생에는 이해가 끼어들 틈이 없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굴러가는 세상에는 불가해한 대상이란 게 없는 탓이다. 이해의 필연성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이 나타날 때만 주어진다. 자기 의지대로 어쩌지 못할 무언가가 놓일 때에야 우리는 ‘나’의 미욱함을 인정하고 ‘당신’을 이해해 보기로 한다.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말이다.
세상의 변화는 항상 상흔을 남기는 법이라 한 인간의 삶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역사는 그렇게 개별 삶을 딛고서야 쓰여진다. 고상욱의 팔십 년 세월 중 빨치산이었던 것은 고작 4년이었다.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의 시간이 그의 나머지 인생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그것만으로 고상욱 한 인간을 대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눈앞의 한 사람을 대하고 그 나름대로의 인연을 얽어갈 따름이었다.
그러니 이해라는 건 실은 그렇게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금 보이는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 이해의 전부인 것은 아닐까. 타협도 아니고 양보도 아니고 수용도 아니고 포용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두는 것 말이다. 그걸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오해하고 오인하고 어떤 꼬리표들을 단다.
화자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느낀 것은 그런 것일 테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얼굴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마주하는 것. 그게 이해의 시작이자 끝이지 않겠나. 신념도 인간 된 도리 앞에선 무의미하고, 아무리 이념이 한반도를 두 동강 내었다지만 거기나 여기나 사람 사는 건 매한가지 듯이. 해방은 어디 저 멀리 있지 않다. 그저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울음이 터진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소설 초반부에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어쩌면 저 문장들이 전부이지 않을까. 고상욱이 빨치산이 되었던 것도, 그가 고아리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도 모두 다만 거기에 그것들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의 죽음 또한 걸어가던 길에 하필 전봇대가 있는 바람에 벌어진 일인 것처럼. 그러니 사실 화자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존재를, 고상욱이라는 사람을. 다만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그리고 마침내 지연된 마침표는 제자리를 찾는다. 이해의 반대말은 불가해가 아니라 외면일지도. 이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