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정보라(2023), 『저주토끼』, 래빗홀
저주는 애정을 먹고 자란다. 별것 아닌 듯해서 신경 쓰지 않고 그 애정을 있는 그대로 두었다가 변을 당한다. 저주는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어서 언제 자랐는지 모를 손톱처럼 느긋하고 소리 없다. 흔적은 있는데 자꾸만 놓치고 낌새 채더라도 헛다리 짚기 일쑤다. 저주를 품은 그것에 대한 애정이 두 눈을 멀게 하는 탓이다.
그러므로 저주를 고이 품은 그것은 예쁘다. 예뻐서 보는 사람을 현혹하고 만든 사람조차 홀려버린다. 그런 뒤 기어코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저주의 대상을 죽여버린다. 그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을 남김없이 갉아먹으며. 그러나 그것이 사실상 덫이었다는 사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저주(咀呪)의 저(咀)는 씹는다는 뜻이다. 씹어 삼켜서 소화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 입에 넣고 씹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배설물을 보고서는 유추할 수 없듯이.
소설집 『저주토끼』는 온도가 낮고 채도는 높다. 단편 하나하나는 모두 저주의 질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꾸만 흠칫거리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뜬금없이 뒤를 휙 돌아보며 두리번거리나, 거울을 보면서 문득 그 속의 얼굴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짓게 된다. 나 또한 이야기 속 인물들처럼 욕망, 그러니까 저주받거나 저주하거나 그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을 법한 짙은 욕망이 잠재한 인간인 탓이다.
저주를 하거나 받거나 그 이면에는 늘 욕망이 도사린다. 한 사람의 탐욕과 이기심이 누군가로부터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저주는 이 마음을 자양분 삼아 싹튼다. 한 번 싹튼 저주는 계속 씨를 뿌리며 끊임없이 돋아나니, 욕망으로부터 말미암은 탓이다. 하여 결국 저주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가 돌이킬 수 없이 외롭게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침잠하고야 만다(「차가운 손가락」). 마치 늪처럼. 욕망은 실현될 수 없기에 결코 완료될 리 없다. 허우적댈수록 깊이 빠져들고 말 뿐이다.
욕망은 사랑과 정의에 기생한다. 인간의 미욱함은 이를 모른 채 탐욕을 사랑이라, 복수를 정의라 오인하는 미련함에 기인한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것을 갉아먹고 씹어먹은 주범이 토끼라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고 잠식당한다. 작고 귀여운 것을 얕보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다(「저주토끼」). 또한 혐오하던 대상에게 도리어 잡아먹히기도 한다. 대장에서 태어나 배설물을 먹고 자라난 “머리”는 태생적 불결함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늘 시야에서 치워버려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끝내 변기에 처박히게 되는 것은 “머리”를 낳고 멸시하던 바로 그다(「머리」). 한편 조물주로서의 인간은 그 손으로 만든 인공지능 피조물로부터 칼을 맞는다. 자신을 능가할 줄 모르고 안일하게 사랑하다가 기어이 그로부터 죽임을 당한 셈이다(「안녕, 내 사랑」).
덫에 걸린 여우를 살려주지 않고 화수분처럼 이용해 먹게 한(「덫」) 인간의 어두운 마음은 그리하여 결국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탐하다 세상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어느 순결한 어린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유지하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어버리게 한다(「흉터」).
인간의 우둔함을 먹고 자라난 욕망은 애정의 외양을 입은 채 저주를 잉태한다. 무의식적 방치와 왜곡된 관심은 저주에 활기를 돋게 하니, 모든 것을 모조리 가르고 먹고 삼켜서 사라지게 한다. 그 끝은 늘 고독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는데, 씨앗 없이 텅 빈 곳에서 홀로 태어났기에 돌아갈 곳이 없는 탓이다.
마침내 세상에 나오더라도 붉은 핏덩이로 흩어져 거두어들일 수 없고(「몸하다」), 남은 것은 여전히 혼자인 자신과 아무것도 쥐지 못한 빈손뿐이다.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은 그림자도 목소리도 없는 “아이”(「즐거운 나의 집」) 혹은 이미 세상을 뜨고도 같은 자리를 배회하는 연인의 유령(「재회」) 같은 비물질적 존재들이라.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 세상 땅에 발을 딛고 살아 있으니, 텅 빈 몸뚱이로도 먹고 듣고 보며 숨을 쉰다. 무너지지 않은 살덩이가 사라지지 않고 홀로 남은 것이다. 저주가 지닌 실질적 공포는 여기에서 비롯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