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를 가기 위한 준비로 현지에서 쓸 유심을 여러 브랜드 중에 고르면서 후기를 한참을 읽게 되었다. '어느 회사 것은 잘 터지고 어느 회사 것은 꽝이었다, 부부가 가게 되면 꼭 서로 다른 브랜드의 유심을 사야 한다, 한 명은 로밍을 한 명은 유심을 추천한다, 오아후와 다른 섬들에서는 빵빵 잘 터지나 빅 아일랜드 힐로 지역에서 유독 유심이 터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등등의 글이었다.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계속 읽게 되었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은 '빅 아일랜드의 힐로지역에서 터지지 않는 지역이 있다'는 것이다.
빅 아일랜드 코나에 도착한 첫날부터 빵빵 터지는 유심에 내가 잘 뽑았구나~ 쾌재를 부르고 신나게 아이 둘을 태우고 차를 몰고 다녔다. 렌터카를 찾고 네비를 켜기 위해 구글맵과 Waze를 번갈아 보다가 나에겐 Waze가 잘 맞아 데이터 문제없이 잘 사용했더랬다.
코나에서 힐로로 넘어와서도 화산국립공원과 힐로의 메인 지역에서도 데이터 한 번 끊김 없이 잘 사용했다. 화산 국립공원을 다녀오고 오후에 또! 스노클링을 해야겠다는 아이들 성화에 거북이 천국이라는 블랙샌드비치로 목적지를 설정 후 운전을 시작하였다.
블랙샌드비치에 도착해서 미리 숙소에서부터 래시가드를 입은 아이 둘 뒤로 스노클링 장비를 들고 해변으로 가려는데 건너편에 있는 레스토랑의 종업원이 손으로 크게 X를 그리며 우리에게 뛰어왔다.
"Hi 혹시 스노클링 하며 수영하려는 것 같은데 여기 비치는 바위가 너무 많아서 아이들이 다칠 수 있어. 이 길로 쭉 차로 조금만 더 가면 비치가 하나 더 있어. 거기서 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다시 차를 몰고 10여분 달렸을까? 네비가 자꾸 끊긴다. 길을 안내하다 말다 급기야 네비가 멈춰버렸다. '아, 이곳이 힐로에서 데이터가 끊기는 바로 그곳이구나'직감하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네비 없이는 길을 모르는 엄마와 아이 둘. 휴대폰이 먹통이 되니 암흑에 갇힌 느낌이었다. 날은 어둑해지고 어서 빨리 아까 왔던 길로 돌아가서 큰 도로로 빠져서 곧장 숙소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조심스레 차를 모는데 도로를 따라 십여 대의 차량이 주차가 되어 있다. 이곳이 아까 종업원이 알려준 그 비치인가? 이왕 네비도 먹통에 길 잃은 거 구경이나 잠깐 하고 가자,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저 아래 해변은 보이는데 도무지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우리는 산 중턱 도로 위, 비치는 저 아래.
절반쯤 산길을 내려와서 본 Kehena Beach. 이때는 몰랐다.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저 사람들은 어떻게 내려간 것일까? 궁금해지는데 수영 후 비치에서 막 올라온 듯한 남자가 차로 걸어온다. 저 비치를 가려면 어떻게 하나요? 하고 묻자 그냥 이 산길을 따라 쭉 내려가란다. 알려주겠다며 앞장서서 길이 없어 보이는 산길을 휴대폰 플래시를 켜며 친절하게 안내한다.
마을 주민들만 알 법한 그런 길이다. 관광객은 우리뿐.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중간에 마을 주민들이 바다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 나온다.
이곳이 아까 종업원이 말했던 그 KEHENA비치가 맞았다.표지판 하나 없고 네비가 터지지 않아 이곳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날 것 그대로의 케헤나 비치. 비록 모래 색은 화산이 폭발한 재로 까맣지만, 영화 Cast away의 톰 행크스가 표류했던 무인도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원초적 그대로의 자연이 이곳에 있었다. 처음 발을 딛자마자 헉 소리가 나왔는데 앞서 메인사진에 올렸던 비치 사진을 다시 잘 살펴보자면.
앞에 나체의 남자가 악기를 두드리며 향을 피우고 무언가 주술을 외우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도 나체의 남여가 있었지만 그들은 곧 떠났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히피족이다.
남자의 등 뒤로 작은 동굴이 있었다.
마치 캐스트 어웨이 영화 속 톰 행크스가 추위를 피하고 파도에 실려온 축구공을 친구 삼아 윌슨이라고 칭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그런 동굴이었다. 호기심이 일어 가보고 싶었지만 주술을 외우는 나체의 히피족 남자에 가까이 갈 수 없어서 딱 이 거리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미국에 유학생활을 하며 36개 주를 여행하면서도 진짜 히피족은 중부 지역에서 보았다. 레게머리로 머리를 땋고 모여서 살고 잘 씻지도 않아 암내가 많이 나던. 마리화나를 많이 피워 암내와 마리화나 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아프던 그 순간이 번뜩 기억이 났다.
서부 산타모니카에 살 때 히피를 본 기억은 주로 베니스 비치에서 석양이 질 무렵 몇십여 명의 히피족들이 마구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둥글게 모여 앉아 그들만의 의식을 했었다. 베니스비치에서 보았던 저녁 석양이 질 무렵 히피들의 의식을 여기서 볼 줄이야.
이곳은 스노클링을 할 수 있는 비치가 아니었다. 몇 발자국만 바다로 내딛으면 급속하게 경사가 깊어지고 파도가 높았다. 접근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케헤나 비치는 알고 보니 히피들의 누드비치였다. 악기를 두드리고 향을 피우고 이름 모를 주술을 외우던 그곳은 근처 주민들 외엔 관광객이면 찾기도 쉽지 않다.
케헤나 비치는 음의 기운이 강했다. 절벽 아래 위치해 주변에 집 한 채 보이지 않아 세상과 단절된 기분마저 들었다. 하와이에서도 빅 아일랜드의 힐로 끄트머리에 있었지만 무인도에 있는 기분. 자유를 표방하는 히피들이 왜 이곳을 찾는지 알 것 같다.
네비 없이 감으로 이곳을 빠져나와 숙소에 도착해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케헤나 비치를 구글링 해보았다. 여타 비치처럼 아무런 정보가 없고 네비가 끊겨 애를 먹다 찾게 된 곳 등의 나와 비슷한 경험담이 몇 줄 있었다. 낯선 지역을 여행하다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을 발견한 기분이란.
이곳을 다녀온 게 올해 1월인데 그 사이 코로나 이후 하와이 여행이 활발해지면서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이 늘고 있다. 히피들이 주로 이곳에서 나체로 다닌다는 경험담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걸 보면 내가 본 게 맞긴 한가보다. 어쩌다보니 히피들의 누드비치를...이것또한 여행의 묘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