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며(7)
노신의 전통관은 수많은 중국인을 향해 고함쳤다. 전통에 안주하며 맹목적으로 전통을 따르려는 중국인들에게 “醒醒吧!“를 외치며 깨우고, 분별력을 강조했다.
가장 노신의 전통관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이라서 모두를 납득할 필요도, 그렇다고 해서 모두를 배척할 필요도 없음을. 노신의 전통관은 합리적이고 간단하다. 즉, 현재 속에서 전통을 다시 곱씹자는 것. 그 과정 중에서 전통은 재해석되고, 시대에 맞는 새 생명력을 얻게 된다.
<만리장성>은 기존의 질서와 틀이라는 전통 속에 갇혀버린 중국인들이 마치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느낌을 준다. 만리장성과 같은 전통이 중국을 보호해 준 것 같지만, 사실상 새 문명과 문화교류의 걸림돌이 되었다. 실제로 만리장성의 건설에도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희생되었던 것 처럼, 어쩌면, 맹목적인 따름과 받아들임의 최후는 그런 비극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노신은 중국인의 이런 부분을 꼬집어 만리장성이라는 요소로 당시의 낙후된 중국 전통과 그를 따르려는 이들을 비난하고 질타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신의 <만리장성>을 읽으며 그동안 나도 모르게 전통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아도 우리들의 삶은 전통을 배제한 후 살아가긴 힘들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는 전통은 장애물이 되므로, 분별력을 길러 필요한 부분만 취하며 당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지금 시대에 전통이 사람을 보존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노신의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이는 노신으로 하여금 자율성과 주체성 모두를 겸비한 ‘초인’의 등장에 희망을 걸게 되었다. 그는 역대의 혼란과 비극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초인’의 등장과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세상은 다스려질 수 있다고 믿었다.
다소 의아했다. 노신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희망을 짓밟고 깎아내리면서까지 후대의 희망을 위해 ‘초인’들을 찾아 헤맨 걸까? 그가 원하던 ‘초인’은 결국 다 혜성처럼 등장했다 사라지기 일쑤였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떠한 학연, 혈연, 지연도 아닌, 그저 이름도 모르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젊은 지식인이라는 것뿐이었다. 도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초인’들을 찾았다고 쳐도, 그들이 어떤 미래를 개척할 줄 알고? 그들이 뒤통수를 쳐 버리면 어쩌자고? 그렇게나 간절하게 희망을 건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비극 섞인 희망은 ‘초인’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되어 작품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방황>의 세 편의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세 편의 작품을 통해, 신세대 지식인들과 ‘초인’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어쩌면 여위보, 위연수, 연생과 자군에게 모두 자신을 대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생명의 길, 진보의 길>을 읽자 많은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진보적이고 낙천적인 생명. 따라서 몇몇 인간의 멸망은 결코 쓸쓸하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는 주장.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땐 ‘몇몇 인간’이 존재 자체로 ‘사회악’ 쯤으로 여겨지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노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초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신은 ‘초인’의 등장은 비록 혜성 같아도, 생명의 순환은 멈추지 않기에 결국 초인은 자연히 등장할 것이라는 한 줌의 희망을 잡은 게 아닐까?
노신은 결국 자신의 희망을 타인들에게까지 전파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다. 생명의 길, 진보의 길 위에서 그는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고, 젊은 세대들을 응원하고 위로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두 차례에 걸쳐서,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던 노신을, 미미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았던 노신을,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하던 노신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앞으로의 내 삶에서도 노신이 살아났으면. 아니, 살아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