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대 4학년의 실수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취업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미국 치대 4학년이 되면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바쁘다. 일단 학교에서 요구하는 졸업 점수들이 있다. 각 과마다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다르고, 졸업시즌이 되면, ‘필기’로 이루어진 국가의사면허 시험인 Board I(예전에는 치대 2학년 때 치렀음)과 Board II를 쳐야 하며, 22개 주를 커버하는 주정부 치과 의사 면허 시험인 Wreb 시험에서 실제 환자를 이 잡듯이 찾아 두 개의 다른 시험을 치르고 두 개의 다른 생니 표본을 가지고 신경치료 시험을 합격해야 최종적으로 면허가 나온다. 날 수를 계산한다면, 시험 보는 데만 꼬박 칠일이 걸린다. 시험 준비도 준비지만, 졸업을 하기 위해 도달해야 하는 점수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온갖 신경이 여러 군데로 분산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졸업할 때가 거의 가까웠는데, 내 환자 중, 한 명이 온 학교를 다 뒤집어 놓는 바람에, 얼마 남지 않은 힘마저 다 빼앗아 가버렸다. 처음에 그분은 너무도 상냥한 중년 부인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이태리 이민자였던 것 같다. 치료할 것이 별로 없어 보였는데 이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다 해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내 손에서 할 만한 치료가 거의 없었다. 그저 나는 아주머니에게 환자들에게 서비스로 나누어주는 치약과 칫솔을 여러 번 더 챙겨주고, 말이 많으셨던 그분의 삶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거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사실 케이스가 하나 있긴 했었는데, 졸업해야 할 단계에서 건드렸다가는 폭탄이 될 만한 그런 사이즈의 케이스가 하나 있기는 했었다. 왼쪽 위의 여섯 개짜리 고정 보철이었다. 문제가 있어서 어느 정도 다른 치료가 끝나면 레지던트 전공의 과정으로 넘길 예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섯 개짜리 고정 보철을 떼어내 버렸다. 왜?! 어찌하여?! 어떤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추측컨대, 모자란 졸업 점수를 그것으로 어떻게 매워 볼 생각이었는지, 졸업 전에 도전이 될 만한 케이스를 멋드러 지게 끝내고 찬란하게 졸업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친구가 된 이 아주머니에게 좋은 마음에 나의 어쭙잖은 실력이지만, 저렴한 가격(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받는 치료는 학교 밖 치과 병원보다는 50프로 이상 저렴함)으로 새로운 보철을 선물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었는지, 어떤 이유였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은 모두 나를 가르치던 지도 교수들을 철석같이 믿었던 탓이리라. 어차피 내 능력 밖의 케이스들은 대부분 지도교수들이 다 뒷수습을 해주셨으니까.
그날 보철을 떼어내니 안에 썩은 충치가 드러났다. X-ray 상으로는 충치와 염증소견이 보이지 않았지만, 엄청난 악취와 함께 오래된 보철의 내부가 드러났다. 신경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전공의 과정으로 보냈을 것을. 후회가 밀려왔다. 어쨌든 그날 임시 보철을 만들어 드려야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학교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오자, 지도 교수들이건 학생들이건 다 짐을 싸고 나가기 시작했다. 마음은 다급해졌고, 최대한 빠른 시간에 보철을 만들었다. 시간이 더 많았다면 더 광을 내어 드렸겠지만, 최대한 보기 좋을 정도로만 만들고 그날의 내 구역을 담당했던 교수에게 검사를 맡았다. 그 교수님은 여섯 개짜리 임시 보철의 상태를 보시고는 아주 괜찮다며, 쿨하게 마무리를 해주시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이 좀 놓이지 않아 그 교수님에게 여러 차례 보철 상태가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그분은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교수님을 붙잡고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은 문제없이 환자를 보내고, 길었던 그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
우리 그룹의 코디네이터의 호출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I think you are in trouble.”(너 큰일 났어.) 이 말은 학교 재학 중 가장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Tell me what happened. Your patient is really upset.”(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해봐. 네 환자가 화가 많이 났어.)
나야말로 어리둥절했다. 이 이태리 이민자 아주머니는 며칠도 안돼서, 신경치료 문제 때문에 교내의 신경치료 전공의에게 상담을 갔다가 그날 담당 전문의 지도교수에게, 내가 지난주에 해준 임시 보철이 최악이라면서 온갖 컴플레인을 그쪽에 쏟아내고, 그 문제가 우리 그룹의 코디네이터와 내 지도교수에게까지 내려와 그날 아침 나의 목을 제대로 죈 것이었다.
여섯 개짜리 보철은 길이가 길기 때문에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나 두세 개를 만들 때 사용하던 재료가 아닌 작업실에서 사용하는 재료를 써야 했다. 그런데, 그 어떤 지도교수도 나에게 그것을 환자 입에 끼웠을 때, 환자가 구강청결이 좋지 않으면 며칠 안에 구취가 나고 임시 보철 색이 누렇게 바랠 것이라는 정보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 재료는 항상 작업실에서 마네킹 치아에만 썼었기 때문에 환자 입에 써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 재료를 환자에게 쓰지 말아야 하는 법은 없었지만, 전공의 과정이 아닌 일개 치대생이 그 재료를 환자에게 쓰는 일이 생길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교수들도 나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았으리라. 그날 내 그룹을 담당하던 교수도 일주일에 하루만 왔다가 가는 책임감이 가벼운 교수였다. 대부분 그런 교수들에게는 복잡한 케이스를 맡기지 않는 것이 동기생들 사이에서는 불문율이었는데, 왜 나는 그날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를 믿으면 안 되었는데.
부들부들 손을 떨며, 화가 제대로 난 이태리 아주머니 환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구리가 팔팔 뜨거운 물에 들어가 삶아지는 기분이 되었다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이 종이보다 더 얇게 썰린 감자칩 같은 기분이 되기를 왔다 갔다 하며, 누구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순식간에 내 존재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육을 탈출하려는 멘털을 겨우 붙잡고 그녀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 아주머니가 나를 물 먹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요는, 신경 치료 컨설트를 간 날, 갑자기 그날 전문의 선생님이 너무 매력적이었는지(신경 치료과에 핸섬한 선생님들이 많았음) 이것저것 말이 많아진 아주머니는 그분에게 학생이 해준 임시 보철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나에 대한 불만과, 해도 될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죄다 쏟아 내고 온 것이었다.
그다음 날, 내 치료실로 온 아주머니의 임시 보철을 보는 순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화날만했다. 입 안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났다. 이것은 문제의 임시 보철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날, 내 그룹 담당 지도교수는 내가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을 하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착하기로 소문난 다른 지도교수에게 뒷수습을 부탁했다. 그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시고, 여섯 개짜리의 보철이 아니라 주로 쓰던 재료로, 치아를 세 개만 커버하는 보철을 만들어주시고 끝내버렸다. 그리고 전공의 과로 넘기라고 하셨다. 정석대로라면 여섯 개짜리로 만들어야 했는데, 결국 그분도 세 개짜리로 만들어 그 케이스를 끝내버리신 것이었다. 치대생 레벨에서 쓸 수 있는 재료로는 여섯 개를 만들 수가 없던 것이었다. 내 능력 밖이었다는 것을 그걸로 증명한 셈이었다. 왠지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날 내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내 하늘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렇다 해도 주저앉을 수 없었다. 담당 지도교수에게 버려지고, 믿었던 환자에게도 버려진 채,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을 꿋꿋하게 해냈다. 머릿속으로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다. 이 환자는 내 환자가 아니다.’라고 최면을 걸며 전자 데이터상에서 그 환자를 전공의 과로 넘겨 버렸다. 썩은 얼굴을 하고 몇 군데 부서를 찾아다니며, 허가 사인을 받았다. 서류상으로도 깔끔했고, 이제 나는 그 환자를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 것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너는 최악이야!’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야!’라는 메아리가 며칠 동안 떠나지 않았다. 이렇다 할 만한 이유도 없이 누군가 나를 정신없이 쫓아오는 악몽에서 여러 날 밤을 시달렸다.
그 몇 주동 안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지만, 혹시라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라도 알게 된다면,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같아 계속 곱씹는 일을 한다. 사실, 다음부터 잘하려고 하는 생각으로 과거를 되짚는 것도 있겠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무도 시원스럽게 도와주지 않는 현실과 항상 면역이 되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책임지기가 버겁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때도 나는 수많은 시간 동안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그 날, 나의 책임은 어디까지였을까. 나는 그날 최선을 다하긴 했던 것일까. 혹시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눈곱만치라도 자만하지는 않았을까. 가슴이 턱턱 막히는 기분으로 며칠을 지내다, 자정 넘은 한 밤중, 또다시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응급실을 들락거리고, 내 인생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한 나날을 보냈다.
결국에는 형편없는 나였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나의 통증과 감정들을 진통제와 함께 힘겹게 떠나보낸다. 그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내 안의 소리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면 어느새 울컥해진다. 능력 없고 볼 것 없는 나라는 인간이 삐걱거리고, 덜걱거리며 사는 인생을 언제까지 참아줄 수 있을지. 그렇게 내 안의 악마가 소리친다.
‘졸업 후, 치과의사로서 경험해야 할 일들을 미리 겪었다고 생각하자. 내가 손댈 수 없는 것들은 주저하지 말고 더 나은 능력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일종의 교훈을 배웠다고 생각하자’라며 또 다른 목소리가 나를 위로한다.
치과의사는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고, 서비스 직종으로써, 미국에 있는 치과의사들끼리는 이 직업이 3D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학구열이 높은 한국에서는 공부를 오래 했다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거쳐온 시간들에 경의를 표하기 때문일지도. 의사라는 타이틀 자체가 주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왕관 같은 것이 그들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런 일련의 행동들 때문에 한국에서 의사 타이틀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내가 뭔가 굉장하고 중요한 일을 하는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어깨가 한껏 올라가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의 사정은 다르다. 에고가 강하신 분들의 집합체 같은 곳이 미국이란 나라다. 백인들로부터 시작된 이민자들의 땅, 그들의 속성은 자아가 강하지 않으면, 이 척박한 개척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약육강식의 서바이버 게임이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고, 나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금세 맹수로 변하여, 왕이건 대통령이건 상관없이 공격태세를 갖춘다. 나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면, 그날 자신의 기분이 얹잖다는 이유로, 그날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쉽게 상대방을 무참히 짓밟기도 한다. (총질도 쉬운 나라가 아닌가.) 그것이 인종 차별의 형태로 나오기도 하며, 계급 차별, 나이 차별로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에서 치과의사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직업의 타이틀이나 학력의 타이틀을 다 떼어내고, 오롯이 나 자신과 나의 실력만이 남아, 이곳 주민들에게 신뢰를 주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실력자인지 아닌지, 강한 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석이 환자들에게 맡겨져 기름 친 프라이팬 위에 올려진 계란 프라이처럼 뜨겁게 달궈지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치과 의사로 살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매력이 있다. 한번 이들에게 신뢰를 주었다면, 웬만해서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의료 쇼핑하듯이 이곳저곳을 돌며, 자신이 원하는 의사를 쉽사리 찾아다니지만, 내가 일하는 동네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색안경을 끼고 보며, 이리저리 자로 재기도 하지만, 그래도 처음 삼 세 번은 나를 찾아와 주어, 그중에 한 번이라도 내가 자기들 마음에 든다면, 사돈의 팔촌까지 우르르 데려오는 건 다반사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처럼 의사에게 자존감을 갖게 해 준다거나, 어깨를 올려주는 일은 하지 않지만, 편안한 친구처럼 길게 오래 같이 보게 된다. 10년 동안의 의사생활을 뒤돌아 보면, 더러 나를 꼭 집어 찾아주는 환자들이 있는 걸 보아, 내가 의사로서도 그리 나쁘지 않은 길을 걸었던 것 같다. 치과 의사로서 일하는 게 어느 나라가 더 좋은지 물어본다면, 덧붙일 말은 많겠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각자 겪어봐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