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대 매 학기, 생명 연장의 방법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졸업 후, 4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을 방한했다. 거의 7년 만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났던 친구들이 알고 싶어 했던 것은 ‘대체 그 많은 미국 치대 학비를 어떻게 감당했느냐’였다.
10년 전, 내가 다녔던 모교는 사립으로 그나마 다른 사립학교에 비해서 조금 저렴한 편이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지원할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1년에 칠만 불 정도가 들었으니, 그때 당시 환율로 계산한다면, 거의 팔천 오백만 원 정도가 들었다. 4년을 꼬박 다니고 나면, 총 삼억 사천만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다. 그때 시세로 학교 주변에 아주 괜찮은 가정집 한 채 살만한 금액이었다. 물론 요즈음은 30프로가 올라 일 년에 일억이 넘는 돈이 든다. 그 이후는 알아서 계산 하시라.
이런 주머니 사정에 대해서는 내가 혹시라도 부잣집 딸내미인가 의심하던 친구들은 아예 묻지도 않았고, 내 사정을 뻔히 아는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준비했었다. 내 마음은 진심이 뚝뚝 흐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돈키호테의 무용담처럼 과장을 조금 보태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하나하나 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들을 한꺼번에 다 풀어놓는 일이 나에게는 조심스러웠다. 어쭙잖은 내 말 주변으로 그들의 도움을 설명하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치대를 준비하기도 전의 어느 날인가, 고등학교 동창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학교 선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옆에 있다가 듣게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들은 그 선배도 미국의 어느 학교로 치과 대학을 진학한다는 소리였는데, 그 많은 학비를 어떻게 대냐면서, 그 집이 넉넉하지 않을 텐데 걱정이라며, 걱정인지 아닌지 그 말투에 시기와 질투가 섞여 있었다.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 선배가 돈이 없으니 기독교 학교의 선교사 지원 프로그램 같은 게 있는데 거기에 지원을 하면, 치대 학비를 면제해 준다더라. 졸업하고 선교사 지원은 냅다 포기하고 현금으로 갚을 거라더라. 뭐 대강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치대를 생각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는 적잖이 언짢았다. 그 선배를 뒤에서 까대는 이야기였고, 그 선배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아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선배가 하려고 했던, 아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만들어 낸 그들의 이야기는 제삼자인 나에게도 아주 불쾌하게 들렸다.
그런 사기꾼 같은 계획이 어디에 있을까? 학비를 면제해 주는 선교사 지원을 했다가, 학비가 해결이 되면, 선교사 파송 계약을 파기하고, 졸업 후 일해서 현금으로 돈을 갚아버린다고?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지. 아니겠지.
나중에 학비가 궁해서 실제로 그런 프로그램이 있나 하고 알아보았는데 존재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유학생 자격으로 나는 해당사항이 없는 데다가 된다 해도, 혹시 내가 그 친구들의 이야기처럼 선교사들의 거룩한 세계를 무시하고, 하늘과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후회로 괴로워하며 살까 하여 꿈도 꾸지 않았다.
나는 다른 방법으로 학비가 해결되었다. 나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치대 등록금이 해결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풀어놓으면, 우리는 ‘신의 딸, 신의 아들’이란 소리를 듣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았다.
나의 치대 학비 사정은 이랬다. 처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결혼 축의금으로 치대 1학년 1학기의 포문을 열었고, 부모님의 도움 삼분의 일, 모르는 분들과 지인의 보증으로 정부 대출금보다 조금 높은 이자의 미국 사채를 끌어다 썼으며, 이자를 싸게 해서 빌려주는 대학원 자체의 대출금을 조금 받아서 다녔다.
어느 시점에서는 학비가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돈 나올 구멍이 없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돈 때문에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을 유지했고, 두 번째는 걱정을 하는 대신 학생 신분으로 해야 할 일들을 지속해 나갔고, 세 번째는 무작정 기도하는 것이었다. 기독교학교를 나온 덕에 기도하는 법은 잘도 알았지만, 기도를 하고 온전히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부터, 항상 자기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며 살아왔기에 어떻게든 해 본다며, 교회의 아는 분들, 교수님들을 다 찾아다니며, 대출보증을 부탁했다. 그렇게 백방으로 알아보며 부탁을 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No 였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럽고, 안타깝고 해서 그만 하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만두지 않았다. 남편은 항상 식탁에 앉아서 '우리 학비가 어떻게 해결될까' 라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무슨 확신이었는지, 나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대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며 남편에게 상상을 아끼라고 했다. 아마, 그 쓸데없는 상상이 내 걱정을 가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담임 목사님은 누구누구에게 연락을 해 보라고 하셨다. 그분은 교회에서 가끔 뵈었지만, 잘 모르는 분이었고, 그 당시 내가 교회에서 어린이 반 교사로 도움을 주고 있을 때, 어린이 반 총책임을 맡으셨던 여 집사님의 남편이셨다. 내가 예과를 다닐 때부터 어린이 반을 도왔는데, 그 남자분은 어린 두 아들이 어린이 반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매주 아이들 옆에 앉아서 묵묵히 아이들의 작업을 도우셨던 따뜻한 아버지셨다. 성격이 조용하고, 말 수가 없으셔서 안면이 별로 없는 나를 대면 대면해하셨지만, 목사님을 통해 선뜻 나의 학비 보증을 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었다. 남편이 했던 상상과는 아예 다른 방법으로 우리와 전혀 친분이 없는 분이 나의 치대 일 년 반의 학비를 해결해 주셨다. 나는 그 기간 동안 학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다. 천국이었다.
그 이외에는 두 번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학교 대출을 세 번이나 받았다. 이미 초과였기 때문에 마지막 세 번째는 거의 싸우다시피 해서 받아냈다. 첫 두 학기는 친절하기로 소문이 자자하고, 특히 한국 학생들에게 호감이 많은 학생 주임 교수님 덕에 별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세 번째 학비를 마련할 때는 손에 조금 땀이 났었던 기억이 있다. 한국 학생에게 호감이 있으셨던 교수님의 임기가 끝이 나고, 호주에서 갓 오신 깐깐한 60대 남자분이 학생 주임을 이어받았다. 호주라는 곳은 ‘백호주의’가 아주 강한 곳이라는 것은 다 알 것이다. 호주에 가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살짝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학교 대출을 부탁하러 온 나에게,
“한국 학생들이 학교 재정을 다 가져가서 더 이상 줄 수가 없네.”
“어떤 한국 학생을 말하는 건가요? 저희 반에 한국 학생은 여섯 명뿐인데, 그 모두가 대출을 원했나요? 다른 한국 학생들은 엄밀히 따지면, 모두 미국인이지 한국인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화가 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해버렸다. 그동안 나도 미국물을 어지간히 먹었는지, 슬펐지만, 여간해서 주눅 들지 않았다. 어차피 못 받을 거라면, 대차게 말해버리고 다른 곳을 알아보려 했기에. 새로 부임한 학생 주임은 한마디도 안 지고 대꾸하는 나를 보고 순순히, 알겠으니 가보라고 했다. 상담실을 나오자, 학생 주임 비서분이 내게 오셨다. 펀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잠시 기다려 보라며 위로를 하셨다. 이렇게도 착하실 수가. 이미 나는 학교 대출을 두 번이나 받아서 초과 상태인데도 별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는 며칠 후, 내 예상과는 다르게 문제없이 잘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남편이 4학년이 되었을 때, 그 학생주임은 학교에 제대로 적응을 하고, ‘백호주의’를 제대로 실행하셨다. 남편이 학교 대출을 신청하고 상담을 하러 가자,
“학비도 없이 학교를 들어오는 학생이 어딨어? 너 한국에서 왔지? 너 비자 어딨어? 비자 당장 가져와! 학비도 없는 유학생은 비자 뺐고 당장 추방시켜야 돼!”
개념 상실! 어이 상실! 남편은 나보다 더 화가 나서,
“입 조심하시죠. 비자로 위협하고 소리 지른 것에 대해서 소송을 걸겠습니다. 뭐라고 말했는지 다 기억합니다.”
아, 정말 미국에서 더 살다 간, 악에 바쳐 성격 더러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수백 번도 더 했었다. 남편은 말만 그랬지 소송을 걸 위인은 못됐다. 호주에서 오신 학생 주임 선생님이 미국에 살면서 소송 걸겠다는 말을 처음 들어봐서 겁이 났었는지, 나중에는 대출을 무난히 내주었다.
몇 달 후, 다음 학기 학비를 낼 때가 다가오자, 주변에서 우리 대신 걱정해 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은 삼 개월씩 학기가 나눠져 있어, 학기가 참 빨리도 바뀐다. 남편의 친구 중, 예과부터 본과까지 현금으로 학비를 내며, 아버지가 럭셔리 카를 현금으로 결제해주시고, 우리 둘이 쓰는 한 달 생활비의 두배 이상을 쓰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너 다음 학기 학비 어떻게 하니? 내가 빌려줄게.”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자존심 지킨다고, “네 돈 필요 없어. 빌려줘도 당장 못 갚아.”라고 말하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오천 불의 현금을 따로 두 번씩 남편에게 들이밀며,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다음 학기 등록금에 보태. 나중에 돈 벌면 갚어.”라고 말했다. 남편은 그 돈을 받으면서도, 정말 빨리 못 갚는다고 몇 번의 언 지를 더 주면서 오히려 당당했다. 굽신거려도 모자랄 판에.
어떤 날은 별로 친하지 않은 교회 장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는데, 주유소에서 잠깐 만나자고 하셨다. 영문을 알 수 없이, 얼떨결에 나간 남편은 주유소 한편에 주차된 장로님의 차 안에서 같은 방법으로 오천 불을 또 두 번이나 받았다. 그때가 딱 그만큼의 학비가 모자란 상태였다. 우리는 그분에게 따로 부탁한 적도 없었고, 그분이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도 조차 알지 못했다. 이렇게 우리의 예상을 깨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한 번은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남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피곤한 나에게 한 후배가 다가왔다. 그 친구는 유학생 신분으로 유학을 왔지만, 시민권이 있는 잘 생기고 맘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학교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영주권을 취득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내심 부러운 친구였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시민권이 아닌 영주권자라도 정부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학생 신분으로 오는 사람들은 시민권 신분의 남자나 여자를 만나 결혼해야 한다며 내 자식처럼 걱정해주시던 어른들은 그렇게 소개팅을 주선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소개가 없어도 사랑에 운이 좋은 친구들은 시민권자와 결혼해 정부 대출로 등록금을 해결하고 큰 걱정 없이 학교를 잘 다니던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난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어떤 날들은 학비가 부족했을 때, 왜 나한테는 그런 행운이 없었는지 생짜 유학생인 남편을 두고 쓸모없는 후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회한을 풀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자주 남편에게,
“자기야, 친한 친구들 중에 미국 시민권자 남자 하나 골라서 혼인신고하고 와라. 뉴욕은 동성결혼도 합법이니까(그 당시 뉴욕주만 동성결혼이 합법이었다.), 가서 도장 찍고 와. 난 괜찮아.” 이랬다.
남편은 안 그래도 자기가 친한 미국인 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몇 번이나 했었다고. 물론 농담이었지만, 학비 때문에 별 생각을 다했다.
걱정 있어 보이는 내 얼굴을 보고 후배는 무슨 일이 있냐며 물었다. 걱정이 아니라 피곤한 얼굴이었을 텐데. 나는 다음 학기 학비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자기 남편에게 보증인 사인을 부탁해 보겠다고 선뜻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못해 본 데다가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는 나였기에 먼저 이렇게 살뜰히 챙기는 후배가 너무 고마웠다. 그 자리에서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후배 남편 덕에 나는 또 한 학기를 잘 넘어갔다. 한 학기씩 등록금이 해결될 때마다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가며 강을 건너고 있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2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었을 때는 더 이상 학비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고, 받을 사람들한테도 다 받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1프로의 영감으로 채워주길 바라면서 하늘에 기도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던, 얼굴만 알고 지내던 한국 유학생 선배였다. 그 선배는 예과부터 좋으신 보증인을 얻어, 걱정 없이 학비 대출을 해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이 걱정 없는 선배가 왜 전화를 했을까? 요는 이랬다. 그 선배가 유학생의 신분으로 자신의 보증인을 통해 받을 수 있는 학자금 대출이 초과되어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으니 자신의 보증인을 남편에게 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토리가 펼쳐질 줄이야. 불법은 아니었다. 그 대신 우리가 가진 현금을 자신에게 나누어 주면, 그것으로 자신의 남은 이년이 조금 넘는 학기에 해당하는 학비를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현금이 없었다. 남편은 학업에 지장이 되긴 했지만, 보증인을 빌려 받고 나 몰라라 할 수 없었기에 원래 하고 있던 초, 중고등학생 과외시간을 더 늘렸다. 그것으로 겨우겨우 그 선배도 학비를 해결할 수 있도록 2인 3각이 되어 함께 달렸다. 중간중간 선배의 학비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다. 선배는 자신의 신용카드를 끌어다 쓰는 것으로 대체했었고, 나중에는 한도가 초과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까지 갔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남편이 선배의 보증인으로 받은 금액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고, 과외를 해서 번 돈을 겨우겨우 채워가며 둘 다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 선배는 치대 시절, 자신을 도와주었던 보증인에 대한 감사와 힘들게 다녔던 과거의 경험을 잊지 않고, 지금은 모교에서 재정이 부족하여 힘들게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을 선별하여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출금, 부모님 빚, 친구 빚, 신용 카드 빚, 모두 거의 다 해결하고, 남편과 나는 우리가 가장 힘들 때,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이 선배의 사업을 자주 돕는다. 멀리 떨어져 살기는 하지만, 힘든 시간을 함께 지나온 사람들끼리 가끔 연락을 하면, 남편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느낌이 전해진다는 얘기를 한다.
내 인생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주변의 친구들과 사람들이 나를 거부할 때, ‘하늘이 날 죽이려고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자는 그랬던가? ‘밤이 더 어두울 때 별이 더 잘 보인다’고. ‘어떤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나에게 빛을 발하는지 더 잘 보인다고.’ 나와 남편을 도와주고 우리의 힘든 사정을 살피던 사람들은 우리 옆에서 빛이 되어 반짝였다. 남편과 내가 대출보증을 부탁할 때, 태도 돌변하여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 으름장을 놓던 사람들, 눈빛을 피하며 거들먹거리던 사람들, 우리를 벌레 보듯 하며 내쫓던 사람들, 등등 그들의 거절하던 방법으로 그 사람들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도와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면서 함께 가슴 아파하며 기도해 주었고, 어떤 사람들은 앞뒤 재지도 않고 자신의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내었으며, 잘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마음을 열어 우리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고, 또 포기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도록 빛을 비춰주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의 빛이 되어 준 사람은 이미 자신에게 빛이기에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우리에게 비추어진 그들의 빛이, 그대로 우리에게 또 빛이 되고, 그 빛은 또 다른 누군가를 다시 비추게 되는 삶을, 비로소 이어가게 되지 않는가.
빛을 베푸는 사람들이 빛을 비추고, 또 전수하며 더 빛나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가니 이제 나는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