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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Oct 21. 2020

가난한 유학생은 이렇게 결혼하더라

해골 물이 준 깨달음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치대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나와 남자 친구는 결혼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햇수로 4년을 만났고, 유학 초기부터 치대 합격까지 나의 환희와 고뇌를 같이 했다. 그 힘들다는 장기간의 원거리 연애를 끝내고 영광스럽게 살아남았다.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내 바로 밑에 여동생은 내가 결혼 따위는 안 할 위인이라고 생각했단다. 나를 볼 때마다, ‘똥배 나온 저거 언제시집가!’라며 놀려댔다. 나이 차도 많은 언니를 아주 기어오른다. 허구한 날 연애는 제쳐두고 도서관이나 집에 처박혀 책만 파다가, 미국으로 유학까지 가버리니 이제는 남자 만날 일은 이번 생에서는 글렀다 생각했단다. 친구들도 긴 연애 한번 안 해본 내가 어디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약속했는지 의아해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집착한 채, 인간관계에 거미줄을 치고 살았던 20대를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의 남편에 대한 존재가 베일에 쌓여 한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만 무성했다. 남편 되는 사람이 버터 냄새 폴폴 나는 미국 교포라더라. 사업을 크게 하는 돈 많은 부자라더라. 그 소문을 듣고 남자 친구와 함께 오래 웃었다. 소문 중 하나라도 맞는 것이 없었다. 남자 친구는 소문이라도 나쁘지 않으니 친구들에게 별 말을 하지 말라고 욕심 어린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내 예비 남편은 안경 낀 한국 남자라면 다 한 번쯤 들어봤을, ‘성시경’ 닮은 중산층 평범한 가정의 아침에는 밥과 국이 꼭 있어야 하는 토종 한국 남자였다.    

나는 남자 친구가 나와 다르게 튼튼해서 좋았다. 처음 봤을 때는 사실, 돌을 씹어 먹어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불사신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할 때마다 동네 허름한 체육관에서 항상 운동 중이었다. 그 당시 남자 친구는 내 허벅지 만한 팔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나이 때에는 근육질의 남자가 비호감이었던 터라, 그저 팔뚝이 기형으로 두껍다는 생각 외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나중에는 성실히 운동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여는 데는 충분했지만.

그는 버스비를 절약하기 위해,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 정류장 열개 정도의 거리를 맨몸으로 뛰어다녔다. 어느 날, 그는 얼굴 모르는 체육관 관장님으로부터 격투기 선수 제의까지 받았었다.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그는 김동현 선수나 추성훈 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팔각형 링위에서 멋지게 발차기를 하는 격투기 선수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솜 넣은 베개 마냥 푹신해진 그의 팔뚝과 배를 만지작 거린다.

안면을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무술에 미쳐, 쌍절곤을 꺼내 들고 내 앞에서 공연을 펼쳤던 이 이상한 남자는 내가 무슨 공부를 하러 유학을 갔는지 알지 못했다. 계속해서 벽을 쳤던 나는 그에게 무엇이든지 말을 아꼈다. 그는 영어학원에서 통역 봉사를 하던 나에게 호감이 생겼고, 서로 얼굴을 모른 채 온라인 영작문 수업에서 선생과 학생 사이임을 알게 되어, 만남의 우연과 숙명에 관하여 신기해했다. 그 덕에 오프라인으로 친분을 쌓으려 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 나는 유학을 떠났고 그는 한국에 남았다. 전화로만 대화를 이어가던 우리는 그 수많은 대화 속에 정을 쌓으며 사랑에 빠졌다. 

일 년 후쯤이면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그는 내가 아예 미국에서 정착할 거라고 하니 한동안 난감해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함께 다시 만날 계획을 세우다 결국 남자 친구도 나와 같은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주변에 그 누구도 해외에서 유학을 하던 친구들이 없어 유학은 그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고 했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고, 다른 문화권에서 그 나라의 법을 따르며 익숙하지 않은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으며, 재정이 곱절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는 IMF 때 사업이 크게 몰락해 그 이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부모님도 우리를 통 크게 돕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많이 괴로워하셨다.

어느 날, 깊어 가는 통화 도중, 그가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 하셔?”

“변호사 셔.”

“아, 그렇구나!”

그는 아버지가 변호사 정도는 하셔야 자식을 유학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해였다. 그는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이었다. 내 아버지는 벼농사를 하신다. 그는 내가 “벼농사 져”라는 말을 흘려들어 “변호사 셔”라고 들은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웃지 않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벼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자녀가 태평양 건너 선진국으로 유학을 오는 일은 그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아니었다.

유학을 와서 아버지가 벼농사를 한다고 하면 다들 대농의 딸이라고들 말하지만, 내가 땅부자의 자식이라서 유학을 올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항상 부자인 척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농사짓는 정확한 땅의 크기 조차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마음을 애초부터 없애려고 자식들에게는 항상 집안 재정에 대해서 불려 말하셨단다. 그 오해가 불러일으킨 나의 플랜은 이랬다. 유학 자금이 바닥이 나면, 아버지의 농지를 조금 팔고 나에게 투자하려니.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미국 유학 내내 아버지는 시원스럽게 유학 자금을 내놓으실 수 없으셨다. 치대를 졸업하고 나니 아버지 이름 앞으로 빚만 억을 여러 번 외쳐야 하는 지경이었다. 재정 스트레스에 강하지 못한 유리 멘털의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는 이곳저곳으로 학자금 동냥을 하셔야 했다. 큰 외삼촌, 막내 이모, 이웃집 아주머니, 교회 장로님, 집사님의 안 주머지까지 탈탈 털어냈다. 치대를 다니는 동안 내 학비의 출처를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이리저리 덕지덕지 기워진 적삼 같았다. 그래도 옷의 기능을 하는데 무리는 없었지만, 찬란하고 빛나지는 않았다. 요즘에는 이런 누더기 옷이 명품이 되어 더 비싼 가격에 팔리기도 하더라.

이렇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알 리 없으니 우리는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세상이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했다. 남자 친구나 나나 재정적으로 막강하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일단 돈 되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비용은 우리가 벌어서 다 지불했다. 함께 치대를 합격한 몇몇의 한국 유학생 친구들은 학교 시작 전, 2개월의 방학 동안, 한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맛집을 돌며 재충전을 할 동안 나와 남자 친구는 쉴 틈 없이 일했고, 그 돈으로 스드메*를 적당히 갖추어 2007년 9월, 그 당시 유행에 맡게 평범한 결혼식을 했다.

모든 예비부부들이 살을 빼고 제일 아름다운 모습으로 결혼식을 치렀지만, 우리는 결혼식 비용을 위해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보기 좋게 통통한 몸과 얼굴로 예식을 맞이했다. 지금도 결혼식 사진을 보면, 달덩이 얼굴을 한 두 명이 결혼식 사진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는다. 살을 찌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잠시 동안의 최고의 휴식이었고, 보상이었으니.

우리의 결혼식에서 가족들, 친척, 친지들이 모여 유학생 둘의 예식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모 잘 만나 떵떵거리며 유학도 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부러워했을까? 결혼식에 주례와 음악 연주 행사를 온 분들이 행사비가 왜 이렇게 적냐며, 외국 유학까지 가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도 적은 돈을 지불하냐고 투덜댔을까? 축의금을 낼까 말까 갈등하다가 이 친구들 돈 많으니 돈 안 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스리슬쩍 넘어갔을까? 최소한 우리를 불쌍하게 생각해 동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부러움이나 시기, 질투의 눈이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군가의 평가, 학비 걱정, 미래 걱정은 개나 줘버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집중했다. 이것이 밑천 없는 우리의 가장 큰 장점이었기에. 우연도 그런 우연이 있을까? 결혼식이 끝나고 모여진 축의금은 정확히 나의 치대 첫 학기 3개월 등록금이었다. 부모님은 그 돈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우리의 손에 쥐어주셨다. 그때는 고마워할 감정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내 앞에 펼쳐진 열 다섯 학기의 등록금을 생각하니 그중 한 학기를 메꾼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그 축의금으로 첫 학기를 무사히 다녔으니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내신 모든 가족과 친척, 친지분들이 지금의 나와 남편의 미국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님과 가끔 이런 얘기를 하면, 당신들이 그분들 경조사에 다 쫓아다니며 갚았다고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신다. 고된 길을 지나온 우리가 계속해서 주눅이 들어 있을까 봐 당당하게 어깨 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지나 온 세월에 작은 것 그 어느 하나라도 의미가 없었던 것은 없었다. 

미국에서 우리의 첫 보금자리는 학교 주변에서 월세가 가장 쌌지만 방도 하나 딸린 자그마한 아파트였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워낙 성실해서 그 아파트에서는 오히려 학생 디스카운트까지 받게 되는 호사를 누렸다. 갑자기 이 학교를 결정하고 합격해서 입학한 것에 대해 어깨가 으쓱해졌다.


한 번은 그 아파트가 값이 많이 싼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큰길 건너에 엄청나게 큰 공동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망우리 공동묘지보다는 높지 않았지만, 볕이 좋은 남쪽 방향에 자리하고, 우리가 살던 월세 아파트보다 더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캘리포니아이기 때문에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았지만, 우리의 첫 결혼 1년간 그 아파트에 살 동안의 겨울에는 비가 많이 와서 발목 아래까지 물이 찰랑거린 적이 있었다. 그 많은 빗물은 공동묘지에서 부터 흘러 내려왔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이거 공동묘지에서 내려온 해골 물이야. 잘 느껴봐.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느껴지지 않니?” 남편은 덩치와 다르게 겁이 많아 그런 소리를 하면 나를 흘겨본다. 나는 그 얼굴이 재밌어서 그를 자주 놀렸다. 원효대사가 마셨던 물이 우리 발에 닿았으니, 발목이 물에 잠길 정도의 인생 깨우침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사는 거 별거 없다고. 보이는 것만큼 그리 좋아 보이는 인생도 없고, 못 받아들일 거대한 미래도 없다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며, 현재를 즐기면 해내지 못할 일도 없다고.


*스드메: 사진 스튜디오의 스, 웨딩드레스의 드, 메이크업의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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