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과 검은색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미국 유학을 시작한 지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나와 출발점이 비슷하거나, 먼저 도착해 준비했던 주변 선배들과 친구들이 너도 나도 치대 입학시험을 치르고 입학 지원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물어보니 나도 거의 필수과목을 다 마쳐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입시 원서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나는 이과 입문기를 혹독하게 치른 터였고, 아직도 두 번째, 세 번째 학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의 휴식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쉴 수 없었다. 조금 쉰다고 해서 딱히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첫 유학 일 년 동안 얻은 것은 트라우마를 넘어서 이과 과목들을 무리 없이 들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편안함이었다. 이제는 이과 수업들이 적응이 되어, 아침에는 배를 곯지 않고, 집에서 작은 봉투에 담아 온 마른 시리얼을 깨작거리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 강의실에서는 수업을 들으면서 껌을 씹든, 뭘 먹든 그 누구도 개의치 않은 것이 딱 마음에 들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을 다녔을 때의 한국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내쫓겨났거나, 교수님에게 듣기 싫은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한창나이에 수업을 들으며 먹을 수밖에 없는 젊은이의 사정을 이해해줄 수는 없는 건지.
먹을 것은 고사하고, 패션이 거슬려도 가차 없이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대학교 1학년 때, 김희선이 유행시킨 큼지막한 헤어핀이 대유행 중이었다. 액세서리 가게 어디를 가든 그녀의 헤어핀이 지천이었다. 예쁜 걸 좋아했던 나도 손바닥 삼분지 일만 한 헤어핀을 용감하게 장착하고 열심히 수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30대 젊은 교수님은 내 헤어핀이 눈에 거슬리셨는지, “헤어 핀이 이쁘면 다가 아니야.” 라며 나를 비웃듯이 쳐다보셨다. 어쩌라고.
나중에 친구에게 건너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교수님이 이제는 과거의 언행들을 후회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쉽게 용서했다. 헤어 핀에 비해서 내가 못생겨서 거슬렸을 수도 있었겠다. 몇 년 전부터 뜨거운 미투 사건에 연루된 교수님도 아닌데, 이런 것쯤은 애교 아닌가. 더구나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셨다는데.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어디 있을까.
각설하고, 자유로운 미국 강의실에서 바삭거리는 시리얼 조각들을 씹어 댈 때면, 예전의 내 대학시절이 함께 겹쳐 웃지 못할 기억들이 스쳐 지나곤 했다. 그러다가도 교수님과 눈이 마주치면, 흠칫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국 교수님 앞에서 용감하게 내 입속은 채울 수 있었지만,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기가 여간 서먹한 게 아니었다. 한국의 영어학원에서 만났던 모든 외국인 선생님들은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고 재미있었는데, 이곳의 교수님들은 한국의 원어민 선생님들 발끝도 못 따라온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무뚝뚝하고 불친절하셨다. 특히 과학 교수님들 중에는 더 많았다. 이 또한 한동안 문화충격이었다. 그래서인지 힘이 나질 않았고, 첫 신호탄이 불발이었던 내 학점과 더불어 점점 더 주눅이 들어갔다.
이런 와중에 나는 주변 유학생들의 흐름에 편승해 입시 원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단 DAT (Dental Admission Test)라는 입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한국처럼 시험요령을 잘 가르쳐 주는 학원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지냈던 곳에서는 치대 시험 준비로 유명한 곳은 딱 한 곳이었다. 요즈음은 Princeton Review, DAT Boot camp, DAT Booster들이 더 핫하게 이용되고 있지만, 그때, 그 동네에서 오프라인으로 유명한 곳은 Kaplan 한 곳이었다. 오프라인 Kaplan학원을 수강하는데 이득이라고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을 강사가 책 읽듯이 훑어 나가거나, 강사의 감독 아래 타이머를 해놓고 연습 시험을 치르는 게 고작이었다. 제공되는 자료는 모두 Kaplan에서만 나온 것이 전부였다.
특히나 오지선다가 즐비한 표준 시험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들의 티칭 시스템에 확신이 들지 않아 더욱더 움츠러들어만 갔다. 주관식이라면 자신 있게 쓸 수 있지만, 어쩐지 선택권이 많은 객관식 앞에서는 생각이 많아져 출제자의 의도를 넘겨짚어 주로 나의 고집대로 정답을 삭삭 피해 가는 추태를 보이곤 했다. ‘듣보잡' 시험 기술을 선보이는 나 자신은 항상 표준 시험 앞에 제일 큰 장애물이었다.
미국에서 치르는 객관식 시험이라 해도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나는 희망 없는 사람처럼 뒤로 도태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뜨거운 캘리포니아의 여름은 DAT 준비로 더울 새가 없었다. 학원과 도서관을 오가며 에어컨 바람에 감기가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그 해 여름이 지나갈 때쯤 겨우겨우 DAT를 치렀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락을 결정할 정도로 나쁜 점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합격을 보장해 줄 만한 점수도 아니었다. 유학생이라는 핸디캡을 메우기 위해서 필요한 요인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내 점수가 보잘것없어도 중도 포기란 없었다. 원서를 제출하고, 에세이 시험과 인터뷰를 보게 되는 수순을 밟았다. 쓰고 대화하는 것은 표준 시험을 보는 것보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인터뷰를 하시는 분을 옆집 아저씨 대하듯 최대한 살갑게 편안하게 대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면접관의 첫 질문은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대화는 나에게 주도권이 있었다. 그 시간이 편했다. 거의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일대일 면접시험은 술술 잘 흘러갔다. 웬일인지 다른 학생들에게 던졌던 어렵고 곤란한 질문은 나에게 하지 않으셨다. 멋진 대답을 장착하고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1차에 이어 2차 원서를 다 마감하고 합격여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게 동시에 합격 발표가 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집으로 보내지는 편지 발송으로 합격여부를 알린다. 순서를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성적순인지 무작위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먼저 학교에서 연락이 온다면, 왠지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친구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누군가 먼저 합격통지를 받았다고 하면 한동안 학교가 술렁거렸다.
“아무개 받았대. 너는 받았어?”
“아니, 아직.”
먼저 받는 사람은 기다림의 고통이 짧았다. 그 날 아침, 누가 편지를 받았는지 알아내는 날이면, 하루 종일 학교 수업은 공을 쳤다. 또 한 가지 더 잔인한 사실은 그 편지 봉투에 학교 마크가 함께 오는데, 그 마크의 색깔이 무슨 색이냐에 따라 이미 편지를 뜯지 않아도 통인지 불통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색이 합격한 색으로 적격이었을까? 내가 들어간 학교는 금색이었다. 골드. 불합격한 친구들은 장례식에 잘 어울리는 검은색 마크가 찍힌 편지봉투를 받게 되었다. 그 사실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온 소식은 편지 봉투가 아니었다.
한통의 전화가 왔다. 나를 면접하신 선생님이셨다. 친절하신 그분의 목소리는 나의 안부를 물으시며, 혹시 내가 시험을 한번 더 치를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나의 모든 서류가 잘 접수되었는데, 점수를 살짝만 올린다면, 합격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뭐 이런 학교가 다 있나? 다시 친다고 성적이 더 오를 것 같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라고 답하고는 전화를 끝냈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 자신에 대해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지칠 대로 다 지쳐있었고,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잘 못 챙겨 먹어서인지 몸이 아픈 날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번 더 치르라고 하시니 거부할게 무어냐. 하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딱 그게 내 실력이었던 게지. 학교에 제출했지만, 나에게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 치과 대학원이 시작되는 8월이 거의 다 되었을 때는 올해는 글렀다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때 즈음, 내 앞으로 학교 마크가 찍힌 편지가 도착했다. 마크의 색깔은 검은색. 오랜 투병생활로 오늘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환자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과 같았다. 내 마음은 이미 상중이었다.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고, 남자 친구에게 대신 읽으라고 던져주었다.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더 잔인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뭘. 그 해에 입학을 했어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훌훌 털고, 나는 다음 학기를 준비했다. 내년을 기약하며.
한 번의 불통을 경험하고, 그다음 해에 이어지는 원서 접수는 식은 죽 먹기만큼 쉽게 진행되었다. 이미 접수한 서류에 부족한 것만을 채워 넣으면 그만이었다. 인터뷰도 같은 선생님과 또 한 시간을 했고, 면접시험이라기보다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처럼 미국 생활이라든지 미래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방!
“만약 올해도 합격이 안된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와, 이런 질문을 하다니. 이번에도 안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이 있으니, 이 질문에 대해 나 자신에게도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아, 이번에는 꼭 합격하고 싶지만, 이번에도 안 된다면, 저는 정말 슬플 거예요. 하지만, 포기하면 안 되겠죠. 계속해서 과학 수업들을 들으며 합격하지 못한 이유를 알아보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운 다음 다시 지원하겠습니다. 그게 제 계획이에요.”
실제로 내 마음이 그랬다. 안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시험을 두고 공부를 할 때는 경쟁자들을 생각해야 했다. 지극히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치대 입시 준비를 할 때는 경쟁보다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더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더 힘이 들었다. 경쟁자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약해 빠진 나의 몸과 매번 투쟁을 치러야 했다. 잊을 만할 때쯤 찾아오는 소화불량은 내 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매번 확인시켜주었고, 매달 찾아오는 생리통은 학업 이외에 또 다른 고문관이었다. 약해 빠진 내 몸뚱이는 포기의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어떤 날 밤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으로 새벽에 잠이 깨어 몇 시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복통과 생리통이 번갈아가며 나의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몸과 마음이 그로기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금딱지가 반짝거리는 편지봉투를 받았다. 기뻤지만, 잠깐이었다. 빼앗겼던 보물을 다시 찾은 기분이긴 한데, 그 여정이 지독해 상처뿐인 영광처럼 느껴졌다.
중학교 1학년 때, 2학년 선배들과 함께 학교 특활 프로그램으로 가까운 곳으로 등산을 갔었다. 그때 그 산의 높이는 해발 500미터가 조금 넘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다. 평야가 드넓은 내 고향에서 산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 특활활동이 괴로웠었다. 어릴 때부터 다리가 약해서 걷는 것이 힘들었던 나는 엄마의 등을 빌려 자주 ‘어부바’를 했었다. 엄마를 떠나 집에서 먼 기숙사 학교에서 중학생이 된 나는 이제 어부바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혼자 그 길을 가야 했다. 그래도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덩치 좋은 2학년 선배가 뒤처지는 나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주었다. 그게 없었다면, 나는 그날 정상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가기 싫어 바닥에 주저앉기를 시전 했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씩씩하게 산을 잘도 탔다. 중도 포기자가 없어 혼자 포기를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아 휘청거리는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발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과 주변 경치가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울었다. 다들 이제는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경치를 감상하며 기뻐하고 있을 때, 나는 서러워서 울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가 아팠지만, 목소리만은 우렁차게 엉엉 울어버렸다. 차라리 중간에 포기를 하지 창피하게 통곡하며 울게 뭐람. 나를 돕던 선배는 정상의 기쁨을 즐기다가 내가 옆에서 애처럼 울어 버리니 난감한 표정이었다. 못된 사춘기의 마음이었는지, 고작 이걸 보려고 이렇게 고생했나 싶었고, 별 소득이 없어 보였다. 산 정상에서 우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금색이 박힌 편지봉투를 받았을 때, 그때의 기분과 같았다. 울지는 않았지만, 서러웠다. 기뻐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가족들이, 내 친구들이 내 몫까지 대신 기뻐해 주었다. 그들이 기뻐해 주니 나도 조금은 기뻤다.
내가 유학을 하던 여정은 쉽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내 고집 때문에 밀어붙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에서 나를 돕던 사람들이 많았다. 유학을 오자마자, 나를 환영한다며, 취사가 불편한 미국 기숙사에서 김치에 따듯한 밥을 해주었던 사람들. 차가 없어 이동이 힘들 때마다 기꺼이 내가 가고자 했던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던 사람들. 더운 여름 더위는 먹지 않았나 걱정하며 내 머리통 만한 큰 수박을 사들고 왔던 사람들. 이사 나가야 했던 날, 어떻게 알고 찾아와 자기 트럭을 아낌없이 내주고 짐까지 다 옮겨줬던 사람들. 수시로 아팠던 나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주었던 남자 친구. 유학을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시며 기도했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친구들.
그들 때문에 나는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뒤처지고 힘겨워할 때,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내 곁에 있어 주었다. 여전히 내 삶은 아직도 건강하지 못하고 힘겹지만, 나를 자기 몸처럼 아끼고 언제라도 돕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그들이 나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