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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Oct 07. 2020

포기를 포기하라

어서 와! 이과 지옥은 처음이지?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장렬하게 여름학기를 마치고, ‘정말 지옥이구나’를 여실이 느끼게 될 나의 세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유기화학 과목을 시작하면서, 또다시 여름학기에 겪었던 비슷한 현상을 경험했다. 유기화학이라는 외계 언어가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딘지.’ 신호 끊긴 내비게이션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 길치처럼 번지수를 알 수 없는 유기화학의 개념들을 겨우겨우 찾아가느라 괴롭다 못해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유기화학 담당 교수님은 캘리포니아에 걸맞은 짧고 화사한 옷을 입고 다니는 백인 금발 머리 여학생들만 좋아한다고 소문이 난 60대 백인, K교수였다. 반짝거리는 긴 머리의 금발 여학생들이 왼쪽 귀에 큼지막한 꽃을 귀에 장착하고 강의실로 들어올 때마다, 교수님은 입을 귀에 걸고, ‘Hi!’ 연발하셨다. 귀에다 꽃은 왜 꽂고 다니는지. 여기가 하와이도 아니고. 한국이었으면 특히 K교수 나이 또래 할아버지들에게 미친 X 소리를 들었을 텐데.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캘리포니아는 꽃 꽂은 여인에게 무한히도 관대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해보려고 했으나 손발이 오글거려 그만두었다.


예쁜 걸 무지 좋아라 하던 K 교수님은 우중중한 남학생들이나 나처럼 추리닝을 입고 다니며, 남학생인지 여학생인지 분간이 안 가는 여학생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확연히 티가 났다. 설마! 기분 탓이겠지!

K 교수님에 대한 소문과 현실을 확인하고 난 뒤,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싶어 감정적으로 조금 흔들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30명 정도를 수용하는 작은 강의실에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았다. 비호감 교수님의 침 세례라도 열심히 받는다면, 혹시나 영롱하고 거룩한 A를 맞게 되지 않을까 하여 매 수업시간마다 성수를 맞는 영광을 누렸다. 예상대로, 교수님은 당신의 눈빛을 나에게 공유해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다닌 대학의 이과 과목들은 모두 매주 쪽지시험이 있었고, 전체 성적의 30프로를 차지했다. 매시간 복습을 게을리하게 되면 언제고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교수가 개인 취향이 확실하여 차별을 하든 말든, 나는 감정을 모두 빼고, 담담하게 과목에만 집중해야 했다.  

나는 첫 번째 쪽지시험을 위해 첫 주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벤진유기 화학식과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 한국에 있는 이과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했지만, 역시나 그 개념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겨우겨우 한국말로 풀어서 설명을 듣고 있는데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영어로 들으나 모국어로 들으나 이해를 못하는 건 매 한 가지. 친구는 그걸 왜 이해를 못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결국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주요 개념들만 외우다 시피하고, 첫 번째 쪽지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0점. 빵점이었다.

내 인생 빵점의 역사를 미국에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목놓아 울었다. 기숙사를 나와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멕시코 이민자 하숙집 아주머니가 혹시 한국에 계신 내 가족 중, 누군가 돌아가신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울음의 의미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내 머리는 회생 불능이었다.

쪽지시험에 나온 다섯 문제 모두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화학 구조식과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의 분자들의 움직임이 납득이 가질 않았다. 강의 중에도 머릿속으로 끊이지 않는 질문이 방해가 되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중간 설명이 마치 빠진 듯, 나는 계속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외우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화학반응 속의 모든 절차원소들의 특징들을 다 이해하지 않으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었다. 구구단 외우기처럼 무턱대고 외우는 것은 내 성정에 맞지 않았다. 하나하나 다 써보고, 찾아보고 이해하고 난 다음, ‘아, 이래서 이런 식이 나왔구나’라고 설득시키지 않으면 내 안의 문과생은 ‘나에게 이해를 달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아, 이러다가는 중도포기 내지는, 정신 이상자가 되어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치과대학을 준비하려고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지만, 중도 포기를 택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얘기 들었어? 그 오빠, 한국 간대.”
“왜?”
“몰라, 여러 가지 힘든 게 있겠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그게 내 이야기가 같아서 자주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유학생이 중도 포기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다양했다. 가족의 심각한 문제를 제외하고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면, 영어 미달, 재정 미달, 투지 미달이었다.

영어를 아무리 해도 잘 늘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타고난 적성도 있었겠지만, 미국까지 와서도 주변 친구들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이 영어 향상에 큰 방해가 되었다. 사실 이런 친구들은 마음이 착한 친구들이 많았다. 맺고 끊는 것을 잘하지 못해서 다가오는 한국인 친구들을 하나하나 받아주다 보면, 영어보다는 한국말을 하는 빈도수가 더 많아져 결국 영어능력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누구를 탓하랴!

재정 미달에 관한 문제도 딱히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는 금수저, 흙수저를 논하며 이 땅의 부조리에 관하여 성토를 해봤자 정답은 없으리. 하지만, 재정 미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이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영어, 재정, 투지, 이 모든 삼박자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지만, 주변 친구들은 그 뒤에 숨겨진 이유를 다 알고 있었다. 그저 서로 함구하고 있었을 뿐. 실제로 재정 미달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유학생들은 재정문제 하나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랬다.
  
투지 미달을 겪었던 친구들은 유학을 올 이유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부모님의 강요가 대부분이었고, 강요를 하신 부모님은 이미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큰 사업체를 가지신 분이셨지만, 자식에게 당신의 좋은 가업을 물려주는 대신,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업과 맞지 않는 공부를 더 강요하신 쪽이라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 중에는 영어와 재정, 이 두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불거지면서 흥미 부족으로 이어져 투지 미달의 이유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경우가 빈번했다.

영어는 그렇다 치고 사실, 나는 재정과 투지 미달의 이유에 걸려 있었다. 하나만 더 확실하게 걸린다면, 삼진아웃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치대 입학을 위한 성공적인 필수과목 이수는 언어의 문제를 떠나 문과냐 이과냐의 문제가 더 컸다. 그 당시 내 주변에는 문과 적성을 가지고 이 길에 뛰어든 유학생은 나뿐이었다. 그 이후 내 소문을 듣고 왔는지 문과 출신 친구들이 더러 보이긴 했지만, 내가 시작할 때는 나 하나가 유일했다. 나는 나중에 들어온 문과생 후배들을 보면서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워 마음으로 더 많은 응원을 보냈었다.

나는 이 유기화학을 일반화학 꼴이 날 때까지 둘 수 없었다. 빵점이라니. 한 번만 더 빵점을 맞는다면, 나는 재정문제를 핑계 대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패잔병 신세가 될게 뻔했다. 죽으면 죽었지, 중도포기 한국행은 나에게는 사치였다.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를 반갑게 맞아줄 사람도 없을 테고, 내가 할 일도 마땅치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의자에 꼭 붙어 앉아 무조건 시간을 불태워가며 공부하는 것 외는 방법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불도저처럼 무식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한 권의 교과서를 계속 읽어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다른 교수가 진행하는 유기화학 방송 파일을 어떻게든 얻었다. 반복해서 보고 또 보았다. 여전히 이해 불충분이었지만, 교과서를 읽고, 방송을 보고, 재차 여러 번 반복을 하니 이해라는 것보다는 아예 외워버리게 되었다. 암기가 되고 보니 어느 순간엔가 이해가 암기에 백기를 들었다. 이해를 하고 외워야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거부하고 또 거부했는데, 결국 이해보다는 암기로 가야 하는 것이 맞았나 보다.

두 번째 쪽지시험이 있던 그 주는 잠을 거의 못 잤다. 첫 2주간의 수업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했다.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내 머릿속 문과생을 과학 앞에 무릎을 꿇리고 승복시켜야 했다. 거의 쪽잠을 자면서도 꿈속에서는 유기 화학식이 떠다니고, 공부하던 내용들이 꿈속에서도 내게 말을 걸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영어공부를 하면서 여러 번 영어로 꿈을 꾸곤 했었는데, 꿈속에 이렇게 유기화학이 등장하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그때 알았다. 언어가 아닌 과학과목도 꿈을 꿀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자면서도 공부가능하다는 것을.

하루 24시간 공부가 효과를 제대로 발휘했는지, 두 번째 쪽지시험부터는 대부분 만점을 기록하고, 중간과 기말고사에서 A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점수로 유기화학 1,2,3을 영광스럽게 마무리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내가 유기화학에 무릎을 꿇고 승복하자, 나를 자기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날게 해 준 것이었다. 치과 대학 입학 막바지에는, 백인 금발 머리 여자아이들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비호감 K 교수님도 나의 정성감복하셨는지, 그렇게 받아내기 어렵다던 추천서까지 써주셨다. 할렐루야! 아마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을 수도.

치열하게 공부하는 내 모습을 보던 주변의 친구들은 나를 ‘무섭다’고 했다. 어떤 학생들은 나를 ‘전설’이라고 불렀다. 내가 무지막지하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소문이 한국까지 흘러들어 갔다는 얘기를 나중에서야 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친구에게, “다들 치열하게 공부해. 나만 그렇게 하겠니.”라고 둘러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나는 무슨 신비주의에 빠졌는지, 딱히 함께 다니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말없이 도서관 지하에 박혀 꼼짝 않는 모습을 보던 주변 친구들이 나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게 만들어 냈을 것이다. 나처럼 공부해야 성공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잠도 못 자고, 코피 좀 꽤나 흘려봐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모두가 이렇게 성공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과에 재능이 없는 나였기에 유독 더 힘에 부쳤을 게다.

문과생을 이과생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맞먹는 일이었다. 차라리 ‘이과 뇌’를 이식하는 게 나았으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던 것을 보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어 보인다. 그저 안 할 뿐이지.

2016년 8월, 펜싱 남자 에페 결승전에서 있었던 박상영 선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15점을 먼저 내는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쥐는 마지막 펜싱 결승전에서 13대 9로 박선수가 지고 있었다. 이제 상대가 단 한 번의 가격으로 2점을 먼저 낸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승부였다. 상대 선수에게 점수를 거의 다 내주고 경기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상실감이 크고 겁이 났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보는 사람들도 박선수가 지는 게임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박선수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믿던 그 마지막 시점에서 불가능에 저항하는 전사처럼 홀로 쓸쓸히, 하지만 담담하게 가능을 외친 것이다. 그리고 금메달은 그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성공을 좌우한다는 것이 모든 세계인들에게 여실이 보여준 것이었다.

‘안 된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안 되지 않습니다.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모든 상황에서,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모든 때에,

포기를 포기하고,

불가능저항한다면,

가능반드시 이뤄낼 수 있다고 강력히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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