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기의 추억
* 졸업한 지 12년이 넘었습니다. 미국 치대 입학관련 질문 사양합니다. 죄송합니다.
환상적이었던 나의 첫 3개월간의 봄학기는 끝이 났다.
나의 봄학기는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 여행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디를 쏘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이 땅의 이방인으로서 미국 대학의 교정에 있는 것만으로도, 경건한 마음으로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를 갖추기는 힘이 들었다. 칠렐레 팔렐레 거리는 정신을 부여잡고 강의실 의자에 앉았지만, 엉덩이마저 설레어 중력을 거부하는 가벼운 궁둥이를 붙이고 있느라 혼이 났다.
봄학기는 일반 생물 세 번째 과목과 수학, 영어를 들었다. 월등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마치기는 했었다. 사실 치과 전문 대학원을 입학하기 위해서는 GPA 점수를 잘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 4.0만 점에 4.0으로 유지하려고 피나는 노력들을 한다. 모든 과목에 A를 맞아야만 유지되는 4.0만 점. 단 한 과목도 A 이하의 점수로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렇게 한치에 오차도 없는 점수를 맞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단지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지레짐작으로 혹시나 있을까 하는 먼 나라에서 온 아시아인이라는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이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세울 것이 점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여 어떤 곳에서라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일련의 노력인 것이었다. 아시아인 유학생에게 결점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영어가 현지인보다 떨어질 것이라는 것과 입학 과정에서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인종차별, 기타 등등이 되시겠다.
나의 첫 봄학기 GPA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4.0에는 못 미쳤다. 나는 그 중요한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들어버렸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에라 모르겠다. 벌써 나는 지고 들어가는 게임을 시작 중이었다. 나는 출발선부터 핸디캡이 하나 더 늘어난 아시아인 유학생이 되어 버렸다. 대체 이것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단 말인가.
처음 미국 땅을 밟고 설레던 마음은 오래갔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치대 입학이라 이름하는 괴물의 소문을 듣고 그 셀렘이 한 꺼풀 꺾이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캘리포니아의 풍경들을 즐기던 여행자의 마음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마음을 추스르고 전투 모드로 전환하고 나니, 앗! 벌써 여름방학이 오다니.
캘리포니아의 학기는 쿼터제로 매 3개월씩 나누어 진행된다. 가을학기가 첫 학기이기 때문에 여름방학이 다른 학기만큼 긴 3개월이다. 나는 가장 마지막 학기인 봄학기에 유학을 온 것이었다.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봄학기에 온 나는 긴긴 3개월을 방학기간으로 쓰기엔 위험한 인물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내가 갔던 길을 먼저 간 선배들은 최대한 예과 수업과정을 줄이기 위해 긴긴 여름방학을 그냥 보내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조신하게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를 가지려면 끊임없이 공부 모드를 유지해야 하지 않은가. 미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름학기가 따로 개설되어 있었다. 한국은 조기 졸업을 위해 이열치열로 여름학기를 불태우는 친구들이 많지만, 미국 여름학기에는 주로 좋지 않은 학점을 메우기 위해 재수강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일반화학 1, 2를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초고속으로 끝낼 생각을 한 것이었다. 알고는 못할 짓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여름 학기 수업을 들을 대학으로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으로 정했다. UC계열의 대학은 UCLA를 시작하여 싸고 질 좋은 수업을 제공했다. 내가 선택했던 여름학기 과정은 Riverside에 위치했다. 줄여서 UCR. 사립 대학과 비교하여 되도록 저렴한 수업료를 자랑하는 주립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일개 작은 사립대학을 다니고 있던 나로서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와서 보니 별천지였다. 이래서 미국의 학부모들이 청소년이 되면, Ivy League 학교들을 돌며 견학을 시키는구나 했다. 좋은 학교는 건물들만 봐도 이미 눈과 마음이 매료된다. 미국 대학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높이 솟은 시계탑과 도서관은 그 옆에만 있어도 시간을 붙잡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도 좁은 세상에서 살았었는지.
또, 나는 매일 아침 일부러 만든 공복의 배를 부여잡고 Student Pavillion(학생들이 모여 휴식할 수 있는 작은 휴게소)으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메뉴인 Breakfast Britto(감자, 계란, 약간의 야채를 밀가루 토르티야에 싼 쌈 종류의 멕시칸 아침식사)를 케첩과 멕시칸 핫소스와 함께 먹는 낙으로 입의 즐거움도 더해갔다.
내가 신청한 수업은 한 반에 500명 이상을 수용하는 거대한 강의실에서 진행되었다. 맨 앞자리에 앉지 않으면 교수님의 얼굴이 내 엄지 손가락보다도 더 작게 보이는 불편한 경험을 해야 했다. 수업을 듣는 건지, 수업을 관람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문과생인데, 봄학기 때 들었던 생물 수업보다도 더 이과적인 화학 수업은 교과서를 씹어먹듯이 읽고 교수님을 찾아가서 질문을 해 봐도 배우는 내용은 외계어처럼 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화학의 ‘화’ 자를 설명하는 그런 쉬운 개념조차 어렵게 느껴져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때 나는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바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화학을 배웠다. 흥미롭게 가르치던 화학 선생님 덕에 주기율표를 외우며 화학에 흥미를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재밌게도 나는 미래에 집 어딘가에 실험실을 차려놓고 매일 밤 신기한 실험을 하는 화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화학이란 과목이 처음에는 꽤 마음에 들었었나 보다. 나는 그런 아름다운 기억조차 깡그리 잊어버린 채 콜로세움 경기장 같은 미국의 널따란 강의실에서 창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투우사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빨간 망토를 몸에 칭칭 감고 몸을 버둥거리며 바닥에 엎드러져 뿔이 날카롭게 솟은 투우소의 제물이 된 것 같은 모양새로 덜덜 떨고 있었다.
시험 결과는 보나마다 뻔한 결과였다. C+.
파이널 시험을 보기 전, 나는 교수님을 찾아가 공부가 너무 어렵다며 푸념을 했다. 성적을 잘 받고 싶은데 잘 안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교수님은 나의 쪽지시험 점수 평균을 보시더니, “You will be fine. You don’t need to worry.”(너 괜찮을 거야. 걱정할 거 없어)라고 말해주셨다.
음... 교수님은 나를 뭘로 보고... C+가 fine에 적합한 점수였나? 아님 C+도 감지덕지라는 말씀이었나? 나는 A를 맞아야 한다고요!
교수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아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음을 새삼 자각했다. 화학 두 번째 과목을 수강할 때는 교수님과 눈도 안 맞추고 수업을 들었다. 미워서. 성적은 그나마 나은 B+이었다. 나의 GPA는 점점 4.0과 멀어져 가고 있었다. 패스는 했으니 괜찮다는 말로 위로하기엔 내가 가야 할 고지가 태산같이 높았다.
나는 점점 불가능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의 성적 앞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절망 앞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랐던 나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점점 불안한 마음으로 세상의 짐을 다 지고 다니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온갖 짜증과 분노, 질투, 시기, 불안, 걱정, 우울, 세상에 존재하는 나쁜 감정들은 다 내게로 몰려왔던 것 같다.
어느 날, 오른쪽 얼굴이 붓고 아프기 시작했다. 혹시 ‘볼거리’인가. 유학 온 지 6개월 만에 뭔 일인가 싶어 학교 병원을 찾아갔다. 자기네들은 상주하는 의사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란다. 불편한 오른쪽 볼을 부여잡고 겨우 동네 의사를 찾아갔다. 진찰을 하더니, 요즘 무엇을 먹고 지내는지 물었다. 뜬금없이.
별달리 먹는 것은 없다고 대강 말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내가 제대로 못 먹어서 침샘이 막혔단다. 어이가 없었다. 침이 돌처럼 굳어 알갱이가 되었는데, 그것이 침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치료법을 물어보니, 좋아하는 음식을 먹던지, 아니면 레몬을 먹던지 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간단한 처방을 내렸다. 뭔가 큰 병이 있나 하고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레몬으로 해결할 수 있다니 그것으로 감사했다. 아니 지금 감사하다. 뭔가 큰 시술이 필요한 병이 아니었으니 망정이지. 하지만, 그때는 그것마저 짜증스러워 다 귀찮았다. 스트레스 하나 제대로 감당 못하는 내 몸뚱이 조차 싫었다.
그날 저녁 나는 레몬을 입에 물었다. 오른쪽 귀 밑이 쩌릿하게 아파오면서 침이 갑자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막힌 관을 뚫느라 힘에 겨운지, 그 느낌은 오래갔다. 치아에는 안 좋았겠지만, 통증 같은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레몬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다음 날부터 별 탈 없이 잘 먹은 걸 보면 레몬을 물고 있던 그 어느 시점엔가 침 알갱이가 빠져나왔나 보다.
그 이후에도 내 머릿속은 성적문제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또 어느 날, 다른 놈이 내 몸 어딘가를 공격 중이었다.
허벅지 왼쪽 사타쿠니 안쪽, 살을 옴팡지게 짓누르는 작은 돌멩이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종기였다.
종기는 일종의 여드름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종기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시간이 지나면 여드름이 없어지는 것처럼 종기도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됐을 때, 의사도 없는 학교 병원을 다시 찾았다. 아니 양호실이라고 해야 하나.
간호사 선생님은 너무 늦게 왔다며, 내 허벅지 종기에 사망선고를 내리셨다. 크기가 작을 때는 항생제만 먹고 끝날 일이었지만, 이 정도 사이즈면 째고 며칠 동안 거즈 드레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뭔 말인지. 째는 건 알겠는데, 드레인을 매일 해야 한다고?
오케이. 일단 얼른 쨉시다. 터뜨려버리자고.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고, 베드에 누웠다. 간호사 선생님은 수술칼과 갈색 소독약, 거즈 뭉치 등등, 필요한 것들을 차가운 스테인리스 쟁반에 들고 오셨다. ‘한번 째는 거야 뭐 살짝 아프겠지’ 하고 자세를 잡았다. 갈색 소독약을 묻힌 거즈가 한두 번 쓱쓱 종기 위를 지나갔다. 언덕처럼 솟아오른 종기는 이미 내 살이 아니었다. ‘악’ 소리가 났지만, 참았다. 덩치 좋은 미국 간호사님의 손은 느렸다. 허벅지 살을 째는 칼의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까지 알 수 있는 아픔이었다. 아니 칼보다는 사실 고름이 그득 들어찬 종기가 더 아팠다. 절개를 마친 간호사님은,
‘Ok, here we go.’(자, 이제 시작한다.)
종기를 짠다는 소리였다. 아플게 뻔했다. 가만히 있어도 왼쪽 허벅지에 심장 하나가 더 생긴 것처럼 욱신거렸는데, 당연히 아프겠지. 선생님의 종기 압출은 이 세상 기술이 아니었다. 라텍스 장갑을 낀 간호사 선생님의 손은 아무런 장비 없이 자신의 손 힘만을 사용하여 애저녁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종기를 억지로 끄집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셨다. 나는 어땠냐고? 내 목청이 이것밖에 안 되었나 후회가 될 정도로 학교가 떠나가게 비명을 질러댔다.
목이 다 쉬어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을 때쯤, 선생님은 “It’s all out. Good job, good job!” (다 나왔어요. 잘했어요.) 모기만 한 목소리로 “Thank you.”라고 말했다. ‘Can I see my baby?’(우리 아기 좀 볼 수 있을까요?)라고 말할 뻔했다. 그 상황에서도 개그 욕심이 났는지.
세상 구경 실컷 하고 있는 피고름들은 장관이었다. 거즈와 뒤섞여 뻘겋고, 누리끼리하고, 걸쭉했다.
아팠지만, 속이 시원했다. 저 악독한 것들이 내 몸 안에 있었다니.
선생님은 다시 말을 이어간다.
“Now, I am going to put a piece of gauze into the hole.”(이제, 거즈를 종기 구멍 안으로 집어넣을게요.)
“What?”(뭐라고요?)
다 짜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 안으로 거즈를 집어넣는다고? 아, 이게 아까 말한 거즈 드레인이라는 거였군. 그저 서야 감이 왔다. 그런데 다 곪아 터진 생살 속으로 저 거칠고 빳빳한 거즈를 집어넣는다고? 더 이상 지를 목소리가 남질 않았는데. 아까 다 써 버렸는데 큰일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한쪽 다리를 자르기 전에,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을.
소독약을 묻힌 손가락만 한 거즈는 내 속살 안쪽을 깊이 파고들었다. 종기를 짤 때보다 열 배 이상은 더 아팠다. 나는 또다시 학교가 떠나가게 비명을 질렀다. 다 써버린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내 목소리는 우렁차게 한번 더 길게 뽑아져 나온다. ‘비명창’이라는 게 있으면 대상감이었을지도.
허벅지 안쪽으로 길게 내려온 거즈의 모습은 장례식에 들어온 화환의 리본처럼 보인다. 나는 며칠간 종기 장례식을 거하게 치러야 했다. 세차게 걸을 때에도, 샤워 중에도 거즈는 신통하게 잘도 박혀있었다. 이미 종기는 방을 빼고 나갔지만, 남은 피고름이 잘 나올 수 있도록 손이 느렸던 간호사 선생님이 꼼꼼하게 잘 끼워 넣으셨나 보다.
나는 며칠 동안 그 거즈 교체를 위해 의사도 없는 학교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프런트에서 잡일을 도우며 알바를 하던, 같은 수업을 듣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는 미국인 남학생은 비명을 지르느라 허옇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는 엷은 미소와 짠한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I hope you feel better soon.” (얼른 낫길 바라)라고 말했는데, 위로라기보다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치료실을 나올 때마다 창피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친구, 강의실에서는 한 번도 말하는 것을 볼 수 없었는데 말이라는 걸 하다니. 아, 창피해!
이 망할 놈의 종기. 태어나고 단 한 번도 종기라는 게 생긴 적이 없었는데. 엄마도 없는 미국 땅에서 왠지 서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캔디처럼 울지 않으려고 꿋꿋이 버텼다. 사실, 마른 비명을 세차게 지르고 나면 울 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종기를 두 번이나 만났었다. 공부가 힘들 때마다 찾아오는 종기는 나에게 문과생이라는 것을 재차 알려주었다. ‘너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일반화학 1,2가 끝났을 때에도, 유기화학 1,2가 끝났을 때에도 그렇게 종기는 내 살을 후벼 파고 지나갔다.
종기가 지나간 자리는 이미 새살로 다 채워졌지만, 비가 오면 흉터는 어째 가렵다. 마치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좀 싸한 기분이 든다. 내 몸에 종기 귀신이 아직도 붙어있나 싶어서... 간단히 ‘delete’(지우기) 버튼을 눌러 지울 수 없는 기억이다. 지나온 고통의 기억도 나인 것을 어쩌겠는가. 옷을 갈아입을 때, 비가 와서 가려울 때, 종기 자국을 보며 생각한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좀 더 잘 먹고, 덜 스트레스받고,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겠노라고.
나 잘할게. 종기야, 다시는 오지 말아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