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현대사가 만든 아이러니
일본을 향한 온도 차 – 대만과 한국, 그 다른 기억의 이유
같은 식민 지배를 겪고도, 왜 누군가는 미소를 짓고,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는 걸까요? 대만을 여행하다 보면, 길모퉁이 카페에서 일본 캐릭터가 그려진 머그잔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백화점 한편에는 일본 제품을 앞세운 팝업 스토어가 줄지어 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 지어진 건물들이 여전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 질서나 국민성도 중국 본토보다는 일본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과거 대만 총리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사실도 있습니다.
이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합니다. 같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음에도, 대만은 일본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반면, 우리는 여전히 깊은 상처를 안고 있지요. 왜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역사적 피해의 양이나 고통의 크기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2025년 Taipei Times 보도에 따르면, 무려 81%가 일본에 호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대만인 절반 이상은 “대만은 일본과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라고 응답했지요. 이러한 수치는 단순한 문화적 호감을 넘어, 일본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이 대만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대만과 한국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게 된 걸까요?
식민 지배 이전, 대만은 어떤 땅이었을까
지금의 대만은 중화권 문화의 일부로 널리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 이 섬은 한족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지닌 원주민들의 땅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해양 부족들이 이 섬을 중심으로 살아왔고, 중국 대륙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초, 대만의 역사는 외세에 의해 급격히 바뀌게 됩니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타이완 남부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식민 지배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타이난 지역을 중심으로 요새를 건설하고, 무역 기지로 삼으며 원주민들을 통제했습니다. 같은 시기, 북부 일부 지역은 스페인이 잠시 점유하기도 했지만, 1642년 네덜란드에 의해 축출되며 대만 전역이 네덜란드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 무렵 대륙에서는 큰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이른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혼란기였습니다. 이때 한 인물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그 이름의 주인공은 정성공(鄭成功)입니다.
정성공의 출생부터가 다채롭습니다. 그의 부친인 정지룡(鄭芝龍)은 푸젠성 출신으로, 젊은 시절 해상 무역과 해적 활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이후 명나라에 귀순하여 해군 제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명의 명문가였던 자신의 입지를 저버리게 됩니다.
반면, 그의 아들 정성공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정지룡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성공은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고, 아버지의 청나라 귀순에 반발하여 아예 인연을 끊습니다. 그는 명의 황족으로부터 ‘충성할 성(成)’ 자를 하사 받아 ‘정성공(鄭成功)’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후 그는 복건·광동 일대의 연해 지역에서 해상 세력을 조직하여 청에 저항하는 반청 복명(反清復明)의 상징이 됩니다.
하지만 강력한 청나라의 진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1661년, 정성공은 마지막 근거지를 찾아 대만으로 향합니다. 당시 대만은 여전히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으나, 그는 수천 명의 병력과 민간인을 이끌고 타이난에 상륙해 네덜란드를 격퇴합니다. 이듬해인 1662년, 네덜란드는 항복하고 대만은 정씨 정권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동아시아 최초로 유럽 세력을 몰아낸 사례로, 대만사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됩니다.
이후 정성공은 대만에 명나라의 망명을 위한 ‘부흥 기지’를 세우고자 했지만, 1년 만에 병사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고, 1683년 청나라가 대규모 수군을 보내면서 정씨 왕국은 결국 멸망합니다. 대만은 이때 처음으로 청 제국의 직접적인 지배 하에 놓이게 되며, 본격적인 ‘중국령’ 대만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대만을 ‘문제 많은 섬’ 정도로만 인식했습니다. 수도인 북경에서 너무 멀었고, 행정 효율도 낮았기 때문에 대만은 단순한 변경 지역, 즉 ‘변방’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실제로 대만은 청나라 영토로 편입된 이후에도 긴 시간 동안 지방관이 제대로 파견되지 않거나, 원주민과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할 정도로 통치력이 약했습니다.
이 시기, 대륙에서 수많은 한족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주로 푸젠성과 광동성 출신의 민간인들로, 정성공이 이끌었던 군사적 이주와 이후 청나라 시기의 개별 이주가 겹치면서 한족 사회가 섬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며 대만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며 자리를 잡았고, 정체성 또한 ‘대륙인’이 아닌 ‘대만인’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이들을 ‘본성인(本省人)’이라 부르게 됩니다. 쉽게 말해 ‘원래 이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반면, 1949년 이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 국민당과 함께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외성인(外省人)’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출신 지역의 차이를 넘어, 대만 사회의 정치·문화적 갈등 구조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대만은 청나라 이전에는 변방의 섬이었고, 청나라 시절에도 중심에서 멀어진 소외된 공간이었습니다. 일본이 이곳을 차지했을 때, 처음으로 ‘근대화’라는 이름의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 경험은 훗날 대만인들의 기억 속에 매우 복합적인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일본, 첫 식민지를 ‘대표 상품’으로 만들다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합니다. 그 결과 맺어진 것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는 동시에, 요동반도와 함께 대만과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게 됩니다. 대만은 그렇게, 명분도 예고도 없이 일본의 첫 번째 식민지가 되어버립니다.
일본에게 대만은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외부 영토’이자, 향후 제국주의 확장의 시험장이었고, 다른 열강에게 자신들의 통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쇼케이스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일본은 대만을 철저하게 계획된 방식으로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철도를 깔고 항만을 넓히며, 병원과 학교, 현대적 행정체계를 정비합니다. 단순한 수탈이 아닌, 체계적인 통치와 인프라 구축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이는 철저히 일본의 이익을 위한 근대화였고, 식민 통치의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대만인 입장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남습니다. 청나라 시절 대만은 중앙 정부로부터 방치된 ‘바다 건너 변방’이었고, 정체성 면에서도 뚜렷한 민족적 자의식을 형성할 여지가 적었습니다. 중국 본토와 거리는 멀었고, 문화적으로는 푸젠·광동계 이민자들과 원주민 문화가 혼재되어 있었기에, 일본의 체계적 통치는 오히려 ‘처음으로 체계라는 것을 경험한 시기’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대만인들은 이 시기를 통해 근대적 의료 체계, 위생 개념, 문해 교육, 철도망 등을 처음 접하게 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반도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 러시아 사이에 낀 전략적 요충지였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과 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뚜렷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해 왔고, 무엇보다 일본과는 문화적으로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더구나 조선은 이전까지 외세에 의해 직접 통치를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 통치는 단순한 패배가 아닌, 정체성과 자존심을 뒤흔드는 모욕이었고, 이는 곧 무장 항쟁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항일 의병, 3.1 운동, 임시정부, 의열단, 광복군 등 무력과 외교를 아우른 치열한 저항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근대화를 가져다준 이방인이 아니라, 문화를 말살하고 뿌리를 뽑으려 했던 적으로 각인된 것입니다.
결국 대만과 한국이 일본 식민 지배를 기억하는 방식은, 식민지 시기의 경험뿐 아니라 그 이전의 정체성 형성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대만은 뿌리 깊은 민족주의보다는 지역적 정체성과 실용적 판단이 앞섰고, 한국은 침탈 이전에도 강한 민족적 자의식과 역사적 서사를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이 차이가 오늘날 일본에 대한 감정의 온도 차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서로 다른 ‘그다음 이야기’
진짜 차이는, 어쩌면 일본이 떠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대만은 일본의 손을 떠나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대만인들에게는 해방이었고, 동시에 낯선 ‘중국 본토의 권력’이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단지 새로운 정부가 아니라, 국가 전체를 통째로 대만으로 이식한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 밀린 장제스는 수도 난징을 버리고 대만으로 철수합니다. 이때 국민당 정권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외성인 인구는 약 120만 명. 그 당시 이미 대만 섬에는 약 600만 명의 본성인이 살고 있었으니, 외성인은 전체 인구의 15~17%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피난민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행정부, 군대, 경찰, 사법부, 언론, 교육기관 등 국가 기능을 그대로 갖춘 채 넘어왔습니다. 군 장성부터 말단 공무원, 교사, 법관, 정보기관 요원까지도 모두 외성인이었습니다. 무장한 권력 구조를 그대로 안고 들어온 이 소수의 외성인들은, 압도적인 다수였던 본성인을 ‘피지배자’로 재규정하며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그 통치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었습니다. 국민당은 본성인을 ‘일본에 물든 사람들’이라며 경계하고, 재교육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일본어를 금지하고 중국어만을 강제했으며, 일본 시기의 경험은 ‘부끄러운 과거’로 규정되었습니다. 대만 현지 문화를 배려하기보다, 철저히 본토 기준의 국가 질서를 강요했습니다. 본성인은 공무원 시험을 보기도 어려웠고, 정치·군사·행정 요직은 철저히 외성인 몫이었습니다.
이런 차별은 점점 긴장으로 쌓여가다가, 결국 1947년 2월 ‘2.28 사건’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담배 단속을 계기로 시작된 시민 불만은 전면적인 항의 시위로 번졌고, 국민당은 대규모 무력 진압에 나섭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이는 본성인들에게 “해방 후 더 큰 억압이 시작되었다”는 깊은 상처로 남게 됩니다. 이후 국민당은 본격적인 계엄통치에 들어갑니다. 1949년부터 무려 38년 동안 이어진 계엄령 하에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라졌고, 반체제 인사들은 체포·투옥·처형당했습니다. 언어, 역사, 사고방식까지 철저히 통제하려 했던 이 시기를 대만인들은 ‘백색테러의 시대’로 기억합니다. 문제는 이 억압이 외국이 아니라, 같은 말을 쓰는 ‘중화민족’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외세에 대한 분노와는 다른 차원의, 내재적 배신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간이 흐르며 대만 사회에는 이런 말이 속삭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일본은 외국인이었잖아. 그들은 억압도 했지만, 기회도 줬어. 그런데 국민당은 우리와 같은 말을 쓰면서도, 총을 겨눴지.”
그래서일까요. 그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차라리 일본이 나았던 건 아닐까’라는 회상으로, 그리고 지금의 일본에 대한 상대적 호감으로 번져갔습니다. 현재 대만 사회에서 외성인은 전체 인구의 약 13~15% 정도로 추정되며, 본성인 및 혼혈 2세, 대만 원주민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민주화 이후 세대에서는 출신 지역보다 개인의 경험과 정치적 가치관이 더 중요해졌지만, 여전히 국민당을 지지하는 성향은 외성인 계열에서, 민진당(대만 독립 성향)은 본성인 계열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일본에 대한 대만 사회의 호감은 단순히 ‘식민지 시절이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후의 시간 속에서 어떤 통치와 어떤 억압을 겪었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누가 기회를 주었고, 누가 총을 겨누었는가에 대한 기억이 겹겹이 쌓인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외성인은 같은 말을 썼지만 우리를 억눌렀고, 일본은 외국인이었지만 한 번쯤 기회를 줬다”라고. 그 기억의 층위가, 오늘날 대만 사회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를 만든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대만과 한국. 같은 제국주의의 그늘 아래 있었던 두 나라지만, 식민 지배 이후의 경험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뤄낸 기억을 갖고 있으며, 그 출발점이 되었던 ‘항일의 역사’를 긍지로 여깁니다. 반면 대만은 외세보다 더한 억압을 같은 민족에게 겪은 기억이, 식민 지배를 상대화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내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말해주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았어도, 서로 다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