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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 김안녕 Jul 24. 2024

나의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죽은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데스카드

 이 집에서 -나의 첫 전셋집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도 어엿 5년 하고도 반년이 다 되어간다. 군 전역 이후 내 조막만 한 예산에 맞춘 이 작은 집은, 독립 10년 차 만에 처음으로 집을 꾸밀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내 주머니사정과 맞물려 이래저래 많이도 바뀌어 왔다.


 수번의 변화 속에서도 이 집의 탄생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자리를 잃지 않고 계속 있어 준 -이를테면 개국 공신과 같은- 이들도 있다. 벌써 수년 째 가까이 붙어 살아왔기에 언제나같이 계속 같이 있어줄 줄만 알았건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없듯이, 자연스레 나의 옛 것들은 하나씩 나를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제 몫을 다해 준 당신을 기리며

 예를 들면 얼마 전에 고장 나버린 세탁기 같은 것들이 있겠다. 나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나의 빨래를 맡아 줄 것 만 같았던 그 녀석이 뻗어버리고 만 것이다. 첫 가전 마련에 부담 스러 중고로 구입한 올해로 연세가 15세 되시는 우리 할아버지 세탁기는 그렇게 수리 불가 판정을 받고 내 곁을 떠나갔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가? 처음으로 같이 살 집이랍시고 맛있는 거 많이 해 먹자는 등 E에게 선물 받은 에어프라이기는 얼마나 부려 먹었는지 이가 다 나가 너덜너덜 해졌고, 분수에 없는 고양이 털을 과식해버린 청소기는 이제 소화불량으로 청소기로서의 제 노릇을 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나는 그들에게 생명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괴짜는 아니다. 다만, 지난 세월 간의 내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는 이들이었기에 내 일부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하나하나 죽어감에 있어서 나의 그 무언가도 같이 죽어감을 느낀다. 사물 따위에 자기 연민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 연민이라 함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그네들을 처음 가족으로 들였을 때 가졌던 일련의 마음가짐이라던지, 다짐이라던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수히 변해버린 나의 내면 그 무언가 것들 말이다. 그들이 죽어감에 따라 나의 옛것들 또한 같이 죽어갔음을 느끼다 보면 '아, 내가 이렇게 많이 변했구나' 하며 생각에 빠지다, 결국 결론은 자기 연민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러지?'

  '옛 것을 잘 아껴주며 살았다면 지금은 이렇지 않지 않았을까?' 


 죽어가는 것들은 대체로 서로를 괴롭혀왔다. 첫 만남의 그 설레는 기분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익숙함 속에서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 나가야만 하는 그 처절함만이 남아 서로를 괴롭혔다. 그 어딘가에 익어버린 편리함이 서로에게 독이 되는 걸 알면서도 - 나이가 들어 세탁도 탈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손에 익어 버릴 수 없었던, 그런 나 때문에 꾸역꾸역 세탁을 해나가던 나의 할아버지 세탁기처럼 말이다.  



윤회

 옛것을 과감히 버리고 새것에 익숙해지기로 다짐을 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현재를 괴롭히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으로 어제는 새 세탁기를 결제해버렸다. 300만 원씩이나 하는 거금을 들였지만 이제는 할아버지 세탁기를 보내주기로 판단한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으로 어제는 과감히 E와의 연락을 끊었다. 서로이 끝까지 엄청나게 질척대었지만 이제는 E를 보내주기로 판단한 것이다.


 다음은 이가 다 나간 에어프라이기도 버려내고, 소화불량 청소기도 과감히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새것을 들이고, 새것에 다시 익숙해지고. 그것이 헌것이 되면 다시 새것을 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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