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껍데기 리액션을 내려놓기
사실 나는 하고 싶었던 말을 못 한 것을 후회하기보다는 딱히 맘에도 없던 말을 하고 온 후에 더 진한 후회를 한다. 특히, 분위기가 불편해지거나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있는 게 싫어서 굳이 오버해서 공감하며 박수치거나 오~~ 따위의 감탄사를 넣고 뭔 말인지도 모르겠는 말에 "아 그럴 수 있지 뭔 소린지 알겠다" 같은 헛소리를 종종 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뜨는 그 적막이 너무나 힘들고 특히 그 상황에서 눈을 어디에다 두고 어떤 입모양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최대한 긍정적인 리액션으로 뭐든 뱉게 된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거의 브레이크는 개나 주고 질주하는 빈말열차였다. 재미없어도 적당히 재밌는 척, 딱히 위로할 말 없는데도 위로하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척척박사도 그런 척척박사가 없었다. 누가 커피 마시러 가자고 하면 절대 거절을 못했다. 그때는 나는 내 업무시간 정도는 스스로 조율가능한 능력쟁이라서 그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다 순 뻥이고 그냥 거절을 못해서 남들에게 다 맞추려들었던 거다. 가방끈이 길면 피곤해지는 것처럼 하루종일 척척대는 척척박사는 집에 오면 피로로 기절한다. 내가 내뱉은 맘에 없던 말들은 맘 속에 고여서 묵직하게 나를 누른다. 가관인 것은 한번 이렇게 척척박사 행세를 하기 시작하면 내 리액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져서 갈수록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다 리액션을 게을리하면 오늘 어디 아프냐/텐션이 왜 이렇게 낮냐/지금 공감 안되지? 등등의 말들이 즉각 들려온다.
하지만 이제 나는 무엇인가, 두려울 것이 없는 백수다. 나는 더 이상 평판도 처세도 좋은 사람인척 허허 웃을 필요도 없는 백수다. 그래서 척척박사 직위는 때려치우기로 했다. 사실 때려치우려고 맘을 먹고 던져버린 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애초에 척척박사가 됐던 것도 일부러 내가 의도했다기보다는 그냥 그때그때의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싫어서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그리됐던 것처럼, 척척박사에서 물러나는 것도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이제는 딱히 동의가 안되면 글쎄 잘 모르겠다고 하거나 싫으면 싫다는 말도 할 수 있다. 안 웃긴데 버릇처럼 ㅋ을 여러 개 쓰는 버릇도 많이 줄었다. 안 웃기면 안 웃고 말지 뭐. 처음엔 솔직하게 카톡 보내놓고 혹시라도 상대가 오해할까 봐 맘 졸이면서 답장 올 때까지 카톡을 계속 들락날락하기도 하고 자기 전에 생각하기도 했는데, 갈수록 이제야 내 진짜 옷을 입은 것 같다. 빈말열차에서 내려서 진짜 마음만을 꽉꽉 눌러 담은 직구를 날리는 것 같달까. 물론 상처가 되는 말은 삼가지만 사실 사람 산다는 게 원래 알게 모르게 상처도 주고받고 혹시 내가 실수했다면 미안하다고 하고 그쪽 방면 말은 안 하면 되지 않나 하고 나 좋을 대로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과 무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 그동안 최선 아닌 무리에 매진하느라 혓바닥에 박혀버린 겉치레의 굳은살을 이젠 베어버렸으니 여러분 기뻐하세요, 매일매일 새살이 돋아나는 저의 진심만을 보고 듣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