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기고래 Apr 28. 2024

피해자를 가두는 감옥  <순백의 피해자>

넷플릭스 <베이비 레인디어>를 보고

(이 글은 베이비 레인디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토킹을 당하고 있습니다. 스토커는 내 핸드폰 용량이 터지도록 성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우리 집에도 찾아옵니다. 내 예전 애인에게도 공격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내 직장에 와서 일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풀리지 않는 인생을 위로해 주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번이나 우리는 그저 친구사이라고 이 사람을 달래기도 해 보고, 협박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외진 길에서 쫓아오는 이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데 쫓아와서 내 몸을 더듬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무력해졌고 이 사람이 너무나 무서워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어떤 여자를 어두운 길에서 쫓아가는 후드 뒤집어쓴 덩치 큰 남자를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왜 이 여자는 경찰에 남자를 신고하지 않는 걸까, 친구 사이였을 때 사실 이 여자가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여지를 준 건 없는 건지 생각한다. 상상 속에서 여자는 주로 왜소한 몸집이다. 그래야 우리가 생각하는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한 피해자의 이미지에 들어맞으니까. 스토킹을 당하는 중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라고 말했다든가, 잘 풀리지 않는 하루 끝에 가해자가 너무나 큰 도움이 돼줘서 그의 허그를 허락했다든가의 이야기가 추가되면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응? 이게 스토킹이라고?

이건 사실 넷플릭스 <베이비 레인디어>의 중심 이야기고 주인공은 허우대 멀쩡한 남자다.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잘 되지 않고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도니가 이 이야기의 스토킹 피해자다. 스토커는 마사라는 이름의 본인은 유명한 변호사며, 온갖 유명인물들과 알고 지낸다는 허언을 일삼는 여자다. 마사는 도니를 만나자마자 그의 인생이 어딘가 잘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도 나처럼 상처받은 적 있죠? 누구예요?> 도니는 마사가 어딘가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음을 깨닫지만 아무도 웃어주지 않는 자신의 코미디에 지쳐있던 상황에 무슨 말을 해도 웃어주고 지지해 주는 마사에게 조금씩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다. 하지만 마사의 도니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지고 도니는 마사에게 성추행까지 당하기에 이른다. 6개월간 끝없는 스토킹으로 도니는 피폐해지지만 마사가 와준 덕분에 성공적으로 끝난 코미디쇼, 가장 힘들 때 본인의 편이 돼준 기억 때문에 그녀가 과거에 스토킹으로 인해 감옥에 다녀온 전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마사를 신고하지 못한다.


극 중 도니는 술집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여자 친구에게 마사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도니를 피해자라고 충분히 인식해주지 못한다. 직장 동료들은 마사를 성적 유희의 놀잇감으로만 여기고, 상담하러 온 도니의 핸드폰으로 마사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그 이후 마사는 또 한 번 폭주하고, 마사는 해당 문자를 증거로 제시하며 도니의 코미디쇼를 망치게 된다) 여자 친구는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냐며 도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은 심리치료사기 때문에 마사랑 대화로 해결해 볼 수 있다고 고집하다가 결국 마사에게 신체적 폭행을 당한다.


사람들은, 아니 우리는 어떤 범죄에 있어서 피해자란 이런 모습이어야 해, 끝까지 저항하고 조금도 여지를 줘서는 안 되고 조금의 잘못이라도 해서는 안돼라고 순백의 피해자상을 자꾸만 만들어낸다. 스토킹뿐만 아니라 여타 범죄에도 모두 해당되는 얘기다. 하지만 세상에 피해자가 100명 있다면 100명의 다른 피해양상이 있다. 가해자는 언제나 나쁘기만 한 게 아니고 피해자도 언제나 착하기만 한 게 아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마음에 난 상처라는 틈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그걸 파고든다.


우리들 모두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해보지 않나, 분명히 저 사람이 나에게 가해를 하고 있는데 나는 세상이 얘기하는 피해자의 정석대로 행동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을.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학원을 같이 다니던 오빠가 나를 의자에서 일으킨다면서 손을 뻗어 내 겨드랑이 사이로 넣어 나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손으로 내 가슴을 움켜쥐고 이곳저곳을 훑었다.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동시에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웃으면서 그 오빠와 평소처럼 장난치고 수업 듣고 떠들며 학원버스 타고 집에 왔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아예 없는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때야 어렸으니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유를 스스로 알기도 어려웠고, 본능적으로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을 했다. 하지만 그 오빠를 그 이후에 만날 때마다 움츠러들게 되고, 겉으론 웃지만 손끝이라도 스칠 것 같으면 미리 피하고, 그러면서도 그 오빠와 단둘이 있는 게 무서운 동시에 기대됐다. 이번에 단둘이 있는데 저 오빠가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내가 착각한 게 맞을 테니까 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에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기억 때문일까 어떤 피해자가 피해 인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가해자와 겉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지내고, 살갑게 구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댓글들을 보면 내 맘이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은 이런 순백의 피해자를 강요하는 마인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집에 도둑을 당했다고 호소하면 나는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것처럼, 피해 호소인과 피해자를 구별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도 저 사람은 "왜곡된" 또는 "잘못된" 피해자일 수 있으니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지어내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 감기가 남의 죽을병만 못한 것처럼 나는 그럴 수 있지만 남의 이야기는 나처럼 100퍼센트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면 외우라는 말처럼 피해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세상에 내가 상상하는 순백의 피해자란 없다>라는 말을 외우는 건 어떨까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굳이 말이나 글로 "왜 ㅇㅇ하지 않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를 표현하지 말고 <아 나는 이해력이 부족하구나, 저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네>라고 생각해 보자라고 온 세상에 소리치고 싶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피해자스러움을 강요하고 또 그것을 쉽게 입 밖으로 내는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럴까? 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봤다. 이렇게 순백의 피해자라는 허상을 가지게 된 건 지나친 감정 전이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금방 거기에 스스로를 몰입하고 피해자의 감정을 스스로에게 전이시킨다. 그런데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사정, 가해자와 얽혀 있는 관계들까지 고려하다 보면 그야말로 골치 아프게 복잡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생각을 어렵게 만드는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니라고 규정지어버리는 게 생판 남인 사람들에겐 오히려 효율적이고 쉬운 행동이라 그러는 게 아닐까? 내 맘이 무거워지고 복잡해지는 문제는 아예 문제가 아니라고 거부해 버리는 거다. 하지만 세상사는 원래 칼로 무 자르듯 잘리지 않고 복잡한 게 사람 사는 모양새다. 누구의 인생도 그렇게 간단하게 규정지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전에 정신과 상담을 오랫동안 받을 때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 이렇게 저처럼 힘든 사람들 얘기를 많이 듣다 보면 마음이 너무 힘들지 않으세요? 어떻게 중심을 잡고 이런 우울감이나 무력감에 휘말리지 않으실 수 있나요?>

그때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은 오히려 환자에게 감정적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공감과도 맥이 닿아 있는 것 같다. 흔히 친구가 우울하거나 기뻐할 때 잘 공감해 주려고 지나치게 상대와 나를 동일시하다 보면 어느샌가 내 에너지가 바닥나 이 친구를 피하게 될 때가 있다. 사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오히려 전이, 과몰입에 가까운 건데도. 좋은 공감, 좋은 대화는 이 사람과 나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구나, 오히려 조금 거리를 두고 문제를 푼다고 생각하고 내 감정을 덜어낸 답변을 던지는 게 때로는 그 무엇보다 잘 공감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화법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전문가가 아니라 피해자를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점 없는 피해자를 상상하게 되는 우리를 어떻게 바꿔가야 할지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지만, 상담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얼마나 힘들어요 하며 눈물을 글썽이며 동정해 주던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광경을 목도하면 누구보다 차갑게 대상을 공격할 때가 잦은 것도 아마 다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냥 다들 동정해주지 않고 눈물 흘려주지 않아도 되니 조금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피해자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인내심을 발휘하면 피해자가 힘들어할 이유가 적어도 하나는 줄어들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과거와 맺는 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