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이 소년은 내가 이제까지 어느 한순간에도 느껴보지 못한 격렬한 정열을 이미 가져 봤어요. 사실은 난 부러워하고 있어요, 그 애를. (p.144)
피터 셰퍼가 쓴 희곡 <에쿠우스>(2023, 범우)는 말의 눈을 찌른 한 소년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전해 준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연극 <에쿠우스>는 1973년 영국에서 초연되었으며 약 1년 뒤인 1974년 10월 브로드웨이 플리머드 극장에서 공연되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초연하였으며 최장기 공연, 최고의 관객 동원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연극 <에쿠우스>의 인기로 당시 여대생 중심의 고정 관객층을 일반인으로까지 저변을 넓혔다고 옮긴이는 말하고 있습니다.
<에쿠우스>는 열일곱 살의 소년 알런과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의 치료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알런은 자신이 1년간 일했던 마구간에서 하룻밤 새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찌르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소년은 왜 말의 눈을 찔렀는지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감옥에 보내는 대신 로크비 정신병원에서 의사 마틴 다이사트에게 상담과 치료를 받도록 합니다. 의사 다이사트는 그가 저지른 범죄의 이유와 원인을 찾고자 하지만 알런은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했을까?’<에쿠우스>를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우연히 말을 타본 기억과 함께 말은, 알런에게 경이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광신교도에 가까운 신앙심을 가진 엄마와 무신론자이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아빠의 갈등 속에 성장한 알런은 자기 자신만의 고유함을 주장하지 못하고 미성숙하게 성장합니다. 알런은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도피하듯이 자신만의 존재 ‘에쿠우스’를 비밀스럽게 추앙하게 됩니다. 단단한 근육과 매끈한 피부, 그리고 커다랗고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말의 눈은 10대 소년이 신성시할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그가 진짜 말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상상과 기억 속에 하염없이 커져만 가던 존재를 이제 만질 수 있고 냄새로, 그리고 소리로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결국, 소년은 마구간에 있던 말 여섯 마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는 말의 눈을 찌르기 전 “에쿠우스…… 고귀한 에쿠우스…… 성실하고 참된…… 신의 종…… 그대-신은-이제 아무것도–보지 못한다!”(p.190) 고 말했습니다. 알런은 말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자신의 신전과도 같았던 마구간에서,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고 들판에서 밤새 하나가 되어 달렸던 ‘너제트’와 다른 말들의 눈을 찔렀습니다. 그 절박한 이유가 자기 자신을 신성한 에쿠우스의 굳건한 사제라고 믿었지만 또 다른 유혹에 흔들린 죄책감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헛된 망상에 대해 각성하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눈을 찔렀던 것일까요.
반면 의사인 다이사트는 알런과의 상담을 진행하면서 사회적 통념이 말하는 정상인이 될 수 있도록 치료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알런이 가지고 있던 에쿠우스에 대한 믿음(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속에 경험한 것을 지워야 하니까요. 다이사트는 알런이 말하는 바로 그 '격렬한 정열'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소년을 봐요!…… 내 소망이 이 애를 믿음직한 남편-성실한 시민-관념적인 유일신을 믿는 신도로 만드는 것일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가 한 일은 유령을 만들어 버렸소…….”(p.194)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알런에게 동화되어 갑니다.
무엇을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알런은 환상에 빠져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것일까요? 사회적인 관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남들과 비슷하게 어울려 살면서 자신의 꿈을 말하지도, 꿈꾸지도 않는 삶이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상 속의 에쿠우스와 함께 하는 삶이 멋지다거나 이후에 알런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가 그럴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이사트의 반문처럼 일반적이라든가 정상이라는 말로 격렬한 열정이라 할 수 있는 ‘개성’을 잘라내는 것이 성장의 의미인지는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이사트가 의사로서 그의 역할을 자조적이면서 함축적으로 표현한 대사가 있습니다. “하기야 의사는 정열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p196)
이제는 알런이 왜 말의 눈을 찔렀느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질문들이 맴돕니다. 다이사트는 알런의 정열을 파괴한 것일까? 에쿠우스를 숭배한 알런의 격렬한 정열이라는 것과 그것을 동경한 다이사트에게 동의할 수 있을까? 어떤 이유였든 생명이 있는 존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 <에쿠우스>에서 작가는 알런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독자를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지루해 보이고 평범한 사회 인식에 대해 통렬한 일침을 던지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아쉽기만 한 이 얼떨떨함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불안정하고 나약한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